당신은 삶을 사랑하는가?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하기에 너를 내게 종속시키겠다? 사랑하기에 내 모든 것을 너에게 던지겠다?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다. 니체는 자신에게 뭔가가 흘러 넘쳐서, 그것을 주더라도 내게 어떠한 손해도 되지 않을때, 받는 자 또한 그것을 받으매 거지의 태도를 보이지 않을때, 그때 주고받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에게 폭군으로 군림하거나, 노예로 종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스스로의 넘침을 감당할 수 없을때 그것을 서로 주고 받으며 서로를 변화시키고 서로를 고양시켜 나가는 관계를 말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랑은 거래가 된다. 서로에게 빚진다고 여기는 순간 그들의 관계는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당신은 삶을 사랑하는가?
그렇다. 나는 삶을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삶에 종속되기를 원하지도, 삶에 대해 압제자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삶에 대해 노예가 되느냐, 폭군이 되느냐, 아니면 친구가 될 것이냐. 나는 삶의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 삶을 진정 사랑하기를 원한다. 삶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서로를 변화시키길 간구한다. 삶에 대해 지나치게 유순한 자, 삶에 대해 지나치게 난폭한 자, 그들은 삶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종곡

아들을 사랑하지 않듯
내 시를 사랑하지 않소

어미처럼 살을 찢어 본 적이 없어서요

아비처럼 함부로 시를 다뤘소
시는 나를 닮았소

그만 나처럼 풀이 죽은
그만 나처럼 약해 버린
시를 사랑하지 않소.

(1998년 9월)

고등학교 2학년 때 썼던 시다. 2001년 호주와 함께 낸 시집의 맨 끝에 들어 간 시이기도 하고. 이것은 물론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곧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아버지는 한의사가 꿈이었으나 할아버지의 바람은 그것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지나치게 농경주의적이었고, 아들의 정착과 체제내로의 편입, 안전한 삶을 바라셨고, 그것이 아버지가 교대에 입학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내 아버지는 자신의 꿈이 한의사였기에 내게 한의사로서의 삶을 바라게 된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공공연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 글을 쓰겠다고 의사를 밝혔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울고 아버지는 화내셨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말하셨다. 너의 꿈을 존중한다. 그러나 내겐 네 꿈을 뒷받침해줄 역량이 없다(이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지만, 내 삶에 아버지의 역량이 도대체 왜 필요한가를 생각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없었던 역량은 '아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아들이 헤쳐 나가야 할 고난들을 감내할 용기'였지 싶다). 아. 그때 아버지는 내게 눈물을 보이셨던 것 같다. 아마도 우리는 그날 같이 울고, 다음날 한의대 원서를 작성했었던 듯 싶다.
이러지 않겠다. 그것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아, 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관점에서 최선의 선택을 내게 제시했고, 그것은 지금의 내가 보더라도 꽤나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회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아들에게 한 꼴이 된 셈이다. 나는 만약 아버지가 된다면, 저 시의 어머니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 내 살을 찢고 나간, 나와는 별개인 인간으로 자식을 받아들이겠다. 내 자식이 '나-1'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다. 내 꿈을 자식에게 전가해서 내 자식과, 그의 자식이 이 우울한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이루고 싶은 일은 내 선에서 이루고자 노력할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스무살의 내가 안했을리 없다. 나는 아버지와, 나와, 내 자식과 타협했다. 스무살의 나는 분명히 아버지와 나의 꿈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고 믿었고, 그 확신은 비록 한의대 6년의 생활을 거치며 빛바래졌으나, 그러나 이제 나는 다시 나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 세계에 종속되지 않겠다, 내 삶의 흐름에 종속되지 않겠다. 그리하여 내 삶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고, 내 자식에게 내 꿈을 전가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자식을 갖든 가지지 않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내 삶은 그자체로 자기종결적인 것이다.
인간은 죽는다. 나도 죽는다. 따라서, 나라는 개체는 내 유전자를 보존하고 싶어 한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섹스를 하고 싶어 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 인간은 삶이 유한하기에 섹스를 한다. 모든 생물이 마찬가지다. 섹스를 하고 2세를 낳는다. 2세는 개체의 삶을 지속해 나간다. 그래서 인간은 특정 연령이 되면 2세를 만들고, 2세를 양육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투입된 에너지 만큼을 2세에게서 보상받고 싶어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2세를 만들고 양육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성장과 지속을 위해 투여될 에너지 만큼을 손해보기 때문이다. 나는 극단적으로, 섹스를 하기 때문에, 즉 2세를 낳기 때문에 인간이 죽는다. 라고까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어쨌든. 나는 그 2세를 위한 레이스에 돌입하는 시점을 좀 늦추려고 한다. 그리고 그 레이스에 돌입해서도 에너지 투여를 최소화하려고 한다. 나는 그것이 내 아이의 삶을 위해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내가 원하는 삶을 내 선에서 최대한으로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2세에게 내 삶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내 아이는 자신의 삶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펼쳐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자식을 방치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식과, 자신의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은 미래를 위해, 자식을 위해 과도하게 역량을 쏟고 있는 것이다.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이제 세계는 농경 사회도, 근대적 산업 사회도, 복지가 말소된 과거의 자본주의 사회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일하지 못하는 노년을 위해 젊음을 혹사할 필요가 없는 사회라는 말이다. 이제 인간은, 그때 그때의 삶을 영위할 만큼만 에너지를 투여하면, 즉 일하면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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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안 - '고사관수도'

너무 많이 돌아 왔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가?
그러니까, 나는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하는 것이다. 삶의 흐름에 정신없이 휩쓸려 다니지 않겠다는 것과, 삶을 막무가내로 다뤄 오히려 삶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일단은 지금 그런대로 잘 흘러 가고 있는 내 삶에 연장선을 그어 미래를 조망해 보자. 서른 살 쯤이 되면 공보의 생활이 끝나고, 어느 정도 부원장 생활을 하다가 언젠가 '드디어' 개원 한의사가 될 것이다. 그 와중에 아마 결혼도 하겠지. 아이 둘 정도를 낳고 다른 한의사들과 비슷한 수입을 올리며 차를 몰고 집을 사고 아이들 교육에 헌신하겠지. 아이들 대학에 보내면 50대. 모아 둔 돈으로 해외 여행을 다니고 잘하면 시골에 집을 사서 전원 생활을 즐긴다. 꽤 그럴싸하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 단호히.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삶은 도대체 무엇인가. 스무 살로 돌아가 볼까. 스무 살의 나는 심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했고, 내가 쓴 글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한의대에 진학했고, 지난 6년간 있다고 믿었던 천재성은 단 한번도 빛을 발하지 않았다. 여건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 천재가 아니다. 진주는 진흙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하여 지금의 내 꿈은 소박하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말을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기나 한가?
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나는 이제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듣기밖에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아니, 그 듣기마저도 이제는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글을 읽어도, 한국말을 들어도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한다. 최근에 읽은 라캉은 무의식과 주체마저 언어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드디어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무의식마저 축소된 사람이, 주체마저 흐릿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방치할 수가 없다. 나는 보통의 한의사들처럼 말하지 못하는 인간, 듣지 못하는 인간,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이 진심으로 되고 싶지 않다.
나는 말을 다시 배우고 있다. 말을 계속 배우다 보면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옛날처럼 다시 글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나는 뭔가 만들어 내는 삶을 원한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세계에 나를 나타낼 만한 것을 만들어 내겠다는 것. 내게서 흘러 넘쳐 내 삶에, 내 세계에 사랑의 흔적을 남기는 것. 세계와 더불어 서로를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다.

내 삶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나는 내 삶과 사랑을 나눌 것이고 우리는 서로를 변화시켜 나갈 것이며, 그 사랑의 결과물로 아이를 낳을 것이다. 사랑은 아이를 낳는 과정이다. 내 아이는 위버멘쉬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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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 power - the great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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