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번 작품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고 개연성 없고 난해하다고 해서 별 기대 없이 보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플라톤의 이데아, 니체의 영겁회귀, 프로이트 라캉의 무의식이나 실재계 상징계 이론, 사르트르 까뮈의 앙가주망이나 반항 같은 개념들이 떠올랐다가 다시 미끄러지듯 멀어진다.

 

 

 

---스포---

 

 

 

 

 

 

 

 

 

 

 

 

 

 

 

 

 

 

 

 

 

 

 

 

 

 

여러 기사나 블로그나 유튜브 리뷰들을 보면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런 점이 이 영화의 위대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잡힐 듯 하면서 다시 미끄러지고, 또다시 다른 가지를 뻗는 이야기를 그리 많이 알지 못한다. 나는 이세계의 탁자 아래에서 마히토가 잠을 청할 때 주변을 지키는 할머니들의 인형을 보고 비로소 아, 이게 꿈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하여 이모가 엄마가 되는 상황이나 이모가 동생을 임신하는 상황은 더더욱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히토가 자해를 하고 앓아 누운 후 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7명의 할머니는 인형이 되어 마히토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번갈아 가면서 마히토의 침대 곁에서 실제로 간호를 하고, 서로 두런두런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이야기하거나 나름대로의 상상을 교환했을 것이다. 마히토의 꿈은 제멋대로, 하지만 하나의 결론을 향해 달려가고 그 도중에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꿈결 속을 파고들며 꿈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이를테면 마히토의 엄마가 1년간 사라졌었다는). 

 

결국은 꿈은 깨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큰할아버지는 자신의 꿈속으로 들어가 끝내 나오지 못했지만 마히토는 자신만의 꿈을 포기하고, '친구를 만들'기 위해 현실로 돌아온다.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부조리 가득한 세계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다. 군국주의의 피가 묻은 돈으로 생을 영위하고 배워야 하고 부끄러운 아버지를 받아들여야 하고 이모를 엄마로 받아들여야 하고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고 살기 위해 뭔가를 죽여야 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만의 이데아를 포기해야만 한다. 세계는 모든 사람이 꾸는 꿈들의 각축장, 단 하나의 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링 위에는 올라와 있는데, 지난 밤에 꿨던 꿈이 너무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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