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꿈

우리는 흔히 "네 꿈은 뭐야?"라고 묻곤 한다. 그리고 'dreams come true'라는 영어도 쉽게 이해하고,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도 종종 쓴다. 그래서 '꿈'엔 당연히 '소망'이나 '장래 희망'같은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잠잘 때 꾸는 꿈과 '소망'이나 '희망'같은 것이 언어를 초월할 만큼 그렇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까?
중국으로 가 보자. '남가일몽'이나 '일장춘몽'같은 말들이 있다. 여기서 꿈은 '헛소리 즐' 정도로 이해된다. 그럼 우리나라는? '구운몽'만 봐도 꿈은 '시발 꿈이었구나'의 문맥상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내가 간단하게 하고 싶은 말은, 옛날에도 "네 꿈은 뭐야?"라든가,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은거야."라든가 하는 말이 쓰여졌을까 하는 것이다. 과연 과거 한자 문화권에서 '꿈'이란 단어를 '소망'의 의미로 사용했을까?

이건 전에 이와이 슌지의 '무지개 여신'을 보다가 생각한거다. 거기서도 '유메(꿈)'가 정확히 상기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그걸 보고 순간 의아해진 것이다. 영어권 국가들과 한국, 미국의 언어가 독자적 발전을 해 온 가운데 '꿈'에 그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될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내 결론은 그거였다. 일본과 한국에 dream이란 말이 번역되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별 이질감 없이 '꿈'과 '유메'에도 과거와는 달리 꽤나 긍정적인 '소망', '희망'의 의미가 담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대화가 가능하게 된거지.
"네 꿈은 뭐야?"
"대통령"
"꿈꾸냐?"

대충 이런 글을 어느 게시판에 올렸는데 어떤 분이 중국에서도 현재는 '夢'을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셨다. 역시 dream의 힘은 강한 것?

그러다가 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왜 동양에선 꿈을 허무한 것,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고 서양에서는 긍정적인 것,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보게 되었을까? 그렇게 묻고 나니 꿈을 통해 무의식을 분석하고 그것과 자아나 현실과 연관지었던 프로이트가 떠오른다. 프로이트 이후로 꿈의 지위가 격상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혹시 프로이트가 꿈의 의미를 전세계적으로 변화시켜 버린 것은 아닐까? 좀 많이 나간 경향이 있지만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프로이트 이전 서양 문서(1차 텍스트)에서 '꿈'이 '소망'의 의미로 사용된 적이 있었을까? 좀 궁금해진다.

'꿈보다 해몽'이란 말이 있다. 과거에도 꿈과 현실을 연관짓는 작업은 분명히 행해졌었다. 그러나 그 꿈은 지극히 수동적이고 인간들로 하여금 해석을 요하는 현상이었다. 그 인식 위에 태몽이란 것도 있었고 개꿈이란 것도 있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과거 한국에서 꿈은 일단 자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꾸어지는' 것이었고, 그 후엔 '해석되는' 것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서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성경에도 누군가의 꿈에 하나님이 나와서 길을 인도해 준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과거의 꿈은 일단 자아와 무관하게 '꾸어지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꿈'은 '능동적으로 꾸는'것이기도 하다. 이 양자의 중간에 프로이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일까? '꿈이 너의 무의식이요 너 자체'라고 하던 프로이트를 여기에 끌어들이는 것이 무리일까?

이상, 객관적 근거가 전무한 '꿈'같은 이야기였음.


2. ~해쌓다

내가 경상도 출신이니 '~해쌓다'라는 말을 많이 써쌌다. 왜 앞에선 쌓다라고 쓰고 뒤에선 쌌다라고 쓰냐고?
[싿따]라고 발음되는 이 경상도 말을 과연 어떻게 표기해야 할까? 토지에선 어떻게 표기됐더라.. 잘 모르겠다. 뭐 '쌋다'라고도, '쌌다'라고도, '쌓다'라고도 표기되던 것 같던데. 그래서 나는 이 말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은 '~해쌓다'는 '~해대다'의 의미다. 그렇다면 왜 해대다를 해쌓다라고 바꿔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행위를 해대다, 어떤 행위를 반복하다, 어떤 행위를 쌓다. 은근히 연관되지 않는가? 뭐 이건 내생각일 뿐이고 누구한테 강요할 생각도 없는데,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근데 첨엔 왜 '써쌌다'라고 썼냐고? 그건 '써대었다'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과거형이니까 '었'이 들어간거고, 당연히 '써쌓었다'도 '써쌌다'로 축약된 것.
와 이리 옛날에 생각해'쌌'던 걸 이래 쓰'쌓'는지 모르겠다.


3. 사분

아직도 비누를 '사분'이라고 하시는 노인들이 많다. 내 할머니도 비누를 사분이라고 하셨었는데 왜 그럴까 생각하다가 soap이 생각났다. 뭔가 연관있지 않을까 싶어서 네이버 검색 돌려 보니 역시 불어 savon에서 나온 말이었다. 프랑스 사람이 비누를 첨 가져왔었나?


4. '식다'의 반대말

뜨거운 것이 열기를 잃으면 우리는 '식다'라고 한다. 그런데 차가운 것이 냉기를 잃으면? 그런 말은 없다. 왜 없을까? 간단하다. 과거, '식다'라는 말이 생겼을 때엔 실온보다 차가운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실온보다 차가운 것이 별로 없었고, 따라서 그것이 냉기를 잃을 일이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맥주가 덜차가워졌을 때 우리 심리를 정확하게 표현할 말을 못찾아 헤매게 된다. '맥주가 식었다'도 어색하고 '맥주가 미지근해졌다'도 어색하다. '미지근하다'란 말도 열기를 잃었다는 뜻이고, 보통 '기대만큼 따뜻하거나 뜨겁지 않다'의 의미로 쓰기 때문이다.


5. 경상도 사투리 '노'와 '나'의 구분

다른 지방 출신 친구들이 종종 "밥 묵었노?"라든가 "밥 언제 묵었나?"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런데 이 두 문장은 경상도에선 모두 틀린 문장이다. 경상도에선 "밥 묵었나?"와 "밥 언제 묵었노?"만 존재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친구에게 '나'와 '노'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려 주기 위해 정말 진땀 뺀 적이 있다. 그걸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썼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나'와 '노'를 구분해 쓰고,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 한참 생각하다가 결론에 도달했다. 문장에 의문사가 있을 경우 '나', 없을 경우엔 '노'였다. 근데 어차피 이거 가르쳐 줘 봐야 경상도 사람 아닌 사람이 제대로 구사하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이런 점은 경상도 사람이 쫌 짱인 듯? 최근에 엠비씨에서 경상도 사투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거기서 '노'와 '나'의 구분법도 알려 주더라. 나 혼자 알아낸 걸 국문학 박사가 장황하게 설명하니까 재밌었다.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그 프로그램에서 경상도 사람이 표준어를 배우기 힘든 이유도 알려 줬다. 그 이유는, 경상도 사투리엔 성조가 있기 때문이었다. 경상도 사람이 아무리 표준어를 구사해도 경상도 특유의 억양 때문에 전혀 표준어 느낌이 안난다는 것. 원래는 한반도의 모든 방언에 중국어처럼 성조가 있었다고 한다. 근데 경상도에서만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
결론은, 경상도 사투리는 쫌 고난도, 쫌 짱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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