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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바꾼 사람을 두 명 꼽으라면 나는 곧바로 장자와 니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내게 구원이었다(시적 허용으로다가..).
 
나는 지독한 회의주의자 염세주의자였는데, 그것은 내 신체와 연관이 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신체적인 컴플렉스가 많았다. 폐렴을 두 번 앓았고 감기는 거의 항상 걸려 있었다. 꼬마였던 시절을 생각하면 맨가슴에 와 닿는 차가운 엑스레이 기계의 느낌, 엉덩이에 꽂히는 주사 바늘(침과는 달리 주사 바늘엔 구멍이 뚫려 있어서 무서웠다)의 느낌이 생생하다. 면류나 육류를 먹으면 배탈나기 십상이었고, 입 안도 거의 항상 헐어 있었고, 몸은 나보다 마른 사람을 본 적 없을 정도였으며 햇빛만 보면 눈물이 났다(어릴땐 내가 드라큐라라고 생각했다). 피부도 너무 하얘서 애들이 동태눈깔(눈 크고 마르고 하얗다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러니 내가 어떻게 세계를 긍정할 수가 있었겠는가.

중학교 2학년 때가 피크였는데, 그 때가 아마 내 생애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절일게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시골에서 살았는데 2학년 때 마산 시내로 이사를 해서 도저히 적응이 안됐다. 그나마 잘하던 공부도 하기 싫어서 성적이 떨어졌고, 안경을 쓰기 시작했고, 마음 맞는 친구도 없었고, 애들은 서로 싸우고 왕따시키곤 했다. 딱 그레고르 잠자가 된 기분이었지. 세상은 도대체가 어떻게 돌아 가는지도 모르겠고, 그들은 나를 바라 봐 주지도 않고, 그저 그들 속의 부품이 되어 살아 가는 기분. 성적도 안나오고 몸도 약하고 친구도 없던 나는 그때 꽤나 많이 울었다. 그 후 중3을 지나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고1은 중2의 르네상스였달까. 고1도 꽤나 우울했다. 우선 중3때 그나마 만든 친구들과 흩어졌고, 인문계라 성적 석차도 당연히 낮아졌으며 무엇보다 고등학교의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뭘 그리도 무식하게 외워대야 하는지, 왜 어이 없는 규율에 얽매여야 되는지, 왜 시덥잖은 아이들이 공부 잘한다는 이유로 높이 평가받는지, 왜 머리를 기르면 안되는지, 왜 그렇게 풀 죽어 지내야 하는지, 왜 '그들'의 바람직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엔 금지만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무언가를 하지 않을수록 인정받는 사회. 이것을 긍정할 수 있는가?

그 때 장자와 니체가 내게 다가왔다. 송승환 선생님의 소개로 첫 만남을 가졌는데, 언젠가 송승환 선생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겠군. 고등학교 1학년, 어느 국어 시간에 송승환 선생님이 장자의 호접지몽을 소개해 주셨다. 그거였다. 내게 필요했던 것. 당장 서점에서 장자를 사서 읽었고, 거의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했었다. 세계를 넓게 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한 마리 붕새가 되어 만상을 아우르며 살아 가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니체는 장자를 읽던 중에 '니체는 서양의 장자'라는 소리(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를 어디서 듣게 되어서 알게 되었다. 처음 읽은 책은 한길로로로 시리즈의 '니체(이보 프렌첼 저)'였다. 뭔 소린지 다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고, 그것은 매일 밤 나를 전율과 도취에 휩싸이게 했다. 진짜 웃긴건, 내가 니체를 알기도 전에 집에 1969년판 니체 전집(한국에서 처음 출판된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책세상에서 나온 21권짜리 니체 전집이 있긴 하지만, 나는 1969년판 5권짜리 니체 전집을 더 좋아 한다. 세로로 인쇄된 글자며, 누런 종이며, 냄새며, 한국에 니체를 처음 소개하며 역자가 느꼈을 흥분이며, 다 좋다.

아무튼 고등학교 1학년 후반부터 나는 장자와 니체로 인해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1학년때 교지에 실린 '팡세에 반(反)하여' 덕분에 2학년이 되면서 교지 편집부에 스카웃됐고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좋아(만)하는 여자도 생겼고 밥도 잘 먹었고-_- 생전 안하던 운동도 하기 시작했다. 공부는 여전히 죽어라고 안했던 것 같군; 공부는 고3때 (나름) 열심히 했으니 패스. 아, 고2때 만든 교지에 '디오니소스 윤창'이라는, 3편으로 된 니체에 대한 헌시를 싣기도 했다.

옛날 이야기 쓰다 보니까 재밌네. 언젠가 죽 한번 써봐야겠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니체를 알게 되었고, 니체주의자가 되었다. 내가 뭔데 감히 니체주의자를 자처하느냐고? 니체가 뭔지 알긴 아냐고? 니체주의자라면 푸코나 들뢰즈 정도이지 않냐고?

니체주의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외부를 사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내가 어린 시절 염증을 느끼고 혐오하던 세계의 체제(초자아적, 대타자적)를 해체해냈다.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말했다. 아니, 진리라는 것은 없고,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진리를 만들어 내는 힘의 의지뿐이라고 했다. 그는 초자아와 대타자 내부에서 작용하고 있는 힘들을 분리해냈고 그것의 외부를 발견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것이 바로 니체주의라고 생각한다. 니체주의는 비단 철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세계의 모든 분야에 대해 작용하고 있는 힘들을 밝혀 내고 그것들을 하나 하나 분리시키고 뒤틀면서 실험해 보는 것, 세계가 부여한 욕망 체계를 거부하고 그 욕망 체계 속의 힘들을 분리해 내어 스스로 욕망 생산의 주체가 되는 것. 그런 것은 철학의 외부에, 도처에 존재한다. 매일 매일 세계 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는 이신바예바, 서른 살이 넘어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형택, 자본의 흐름을 자신에게 맞춘 빌게이츠, 새앨범 엠피쓰리를 공식 홈페이지에 올려 버린 라디오헤드, 텔레비전의 아버지 백남준, 사상의학의 이제마. 그들은 니체를 몰라도 니체주의자인 것이다. 그들이 니체주의자가 아니라면, 니체마저도 사랑이나 자신의 신체 같은 분야에 대해서는 니체적이지 못했으므로 완전한 니체주의자는 아닌 것이다.

그런 생각들 때문인지 나는 '디오니소스 윤창'을 교지에 실은 후로 니체에게서 조금 벗어나 살았다. 어쩌면 니체를 버리는 것이 니체를 가장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책과 이성과 정신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본능으로, 몸으로 나아 가는 길. 그러는 동안 몸도 튼튼해졌고, 고3땐 나름 열심히 공부했고, 재수도 했고, 한의사 면허도 땄고, 연애도 했고, 친구들과 재밌게도 지냈고, 음악도 많이 들었고, 스타도 많이 늘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니체에게로 돌아 왔다. 다시 외부를 갈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외부에 대한 갈망이다. 내가 아니게 되는 것. 나로부터 도망치는 것. 다시 한 번 내 몸에 덕지 덕지 붙은 대타자적 욕망들을 벗어 던지는 것. 그렇게 나는 다시 붕새의 꿈을 꾼다.

니체주의에 대한 도식을 그려 보았다. 이른바 '욕망의 삼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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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대타자적 욕망
B: 유전자적 욕망
C: 니체적 욕망(분열증적 욕망?)

이건 전에 진화심리학 관련 리플(2007/10/24 - [소요유] - 진화심리학 관련 리플 모음)에서 처음 써먹은 건데 거기다 C라는 원을 하나 더 붙였다. '욕망의 삼륜'은 라캉의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대한 오마주라고 해 두자. 오래 전에 진화심리학과 라캉과 니체를 종합해 보겠다고 했는데 이게 그 시작이 될 듯하다.
 
우선 프로이트와 라캉이 인정하는 욕망 체계는 A와 B로 이루어진 두 원, A∪B이다. A-B에는 앞서도 말했듯이 종교나 예술 등의 유전자적 요구와 상관 없는 욕망들이 들어가고, B-A에는 단순한 식욕 성욕 자기보존적 반사심리 같은 것이, A∩B에는 결혼이라든지 사회적 성공의 추구나 고급화된 식욕 성욕 같은 것들이 들어갈 것이다. 여기까진 대충 이해되지 싶다.

문제는 C이며 α이다. 프로이트와 라캉이 그토록 치료하고 싶어 하던, 그토록 부정하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영역. 대타자와 유전자의 외부. 물론 대타자와 유전자를 부정할 수는 없다. 대타자를 부정하면 정신병원이나 교도소에 가 있을 것이고 유전자를 부정하면 그는 이미 죽어 있을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니체주의자로서의, 사회에서 살아 가는 인간을 말하고 있다.

그럼 대체 A-(B∪C)는 무엇이며 B-(A∪C)는 무엇이며, 더구나 o며 q며 p 영역은 무엇인가. 먼저 A-(B∪C)는 대타자적 욕망 중에서 니체주의자들이 버린 것이다. 대략 노예도덕이라든가 국가주의 민족주의 순응주의 같은 것일테다. 이 버려진 욕망들은 곧바로 앞에 마이너스 기호를 달고 α 영역으로 간다. 아직 α 영역에 대한 확신이 없지만 -(A-C)와 -(B-C)가 α 영역을 이룰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자 이제 B-(A∪C)로 넘어 가 보자. 여기엔 폐기처분해야 할 유전자의 맹목적 부름이 들어간다. 대략 경제력 높은 남성과 순결한 여성을 원하는 심리(약간 대타자적이기도 하지만)라든가 지방 영양소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나 혹은 포괄적 적응 이론에 입각한 자살충동도 포함될 수 있겠다. 짐작했겠듯이 이것들도 마이너스 기호를 달고 α 영역으로 달려갈 것이다.

앞서 말한 경제력 높은 남성과 순결한 여성을 원하는 심리는 q에 넣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이로써 q도 대략 설명되었겠고. x와 'p1'(p의 일부), 'o1'(o의 일부)에는 말그대로 인간이기 위한 필수적인 욕망이 들어 간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런 것들을 부정하면 인간으로 살아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x에는 대타자와 유전자, 그리고 니체적 욕망의 교집합이 들어 간다. 고급 식욕 성욕 자기보존 욕구, 2세 생산 같은 것들. o와 p는 조금 특이한데, 이 o와 p는 인간에게 있어 α만큼이나 다양한 크기를 가진다. o에는 반드시 욕망해야만 할 대타자적 욕망 중에서 유전자적 힘이 미치지 않는 욕망(o1)과, 욕망하지 않더라도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는 대타자적 욕망(o2)들이 섞여 들어간다. 거기에 왜 굳이 욕망할 필요가 없는 대타자적 욕망이 들어가냐고? 그것이 쓸만하기 때문이다. 'o1'엔 유전자의 요구와 상관 없는 법들(지키지 않으면 처벌받으므로)이, 'o2 '엔 처음 말했던 종교(일단 넣어 주자)나 예술, 입양 같은 것들이 들어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p1'엔 단순 식욕 성욕 자기 보존 욕구 같은 것들이, 'p2'엔 불륜이나 이기주의 같은 것들이 들어갈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개개인의 o와 p에 대한 욕망 스펙트럼은 α 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이제α만 남았다. 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욕망들을 제시하기가 힘들다. α에는 대타자와 유전자에 반대하는 힘들, 즉 -{A-(B∪C)}와 -{B-(A∪C)}나 -q, 혹은 그 힘들을 해체하고 재조립한 힘들이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예도덕에 반대한 귀족도덕,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반대한 아나키즘, 순응주의에 반대한 반항, 포괄적 적응이론에 입각한 자살충동에 반대한 극복의지 같은 것들. 물론 대타자나 유전자와는 상관 없이 '불현듯' 탄생하는 욕망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 자체가 대타자와 유전자에 포획될 수 없다는 점에선 동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B는 인류를 통틀어 동일한 크기, 동일한 모양이다. 그것은 진화심리학에서 보장하고 있으니 믿어 보자.
A는 인류의 역사적, 사회적 여건에 따라 변화한다. 하지만 동일한 공동체에 대해서는 동일한 크기와 모양으로 작용한다.
C는 n명에 대해 n개의 원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A∪B와 일치할 수도 있고, 더 왜소해 A∪B에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으며, α 영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수도 있다.

니체주의자는 이 α를 추구하는 자들이다. 자신의 삶에 매몰되지 않은 자, 항상 대타자와 유전자의 외부를 사유하는 자, 심지어 α의 외부까지도 사유하는 자들이다. α의 욕망에 몸을 맡기고, α를 확장해 가는 자들. 그들이 바로 니체주의자들이다.

그렇다면 맑스주의자는 어떤가? 맑스주의자도 저 도식에 의하면 니체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타인의 α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α 영역을 타인에게 강요한다. 맑스주의의 혁명은 자신들의 α 를 대타자적 A 영역에 포함시키려는 혁명이다. 물론 자본주의적, 국가주의적 대타자에 대한 거부가 어느정도 수긍이 안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혁명을 원하는 한, 다른 대타자를 세우려고 하는 한, 그들은 니체주의자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니체주의자는 아나키스트라고 볼 수 있겠다. 맑스주의에는 외부가, 차이가, 극복이 존재할 수 없기에 자본주의보다 결코 낫다고 할 수가 없다. 이런 점 때문에 까뮈가 사르트르와는 달리 맑스주의를 반대했을 것이다. 그는 맑스주의에 내재된 근본적 반실존주의를 포착해냈을 것이다.

글의 통일성이 사라져 가고 있다. 아니 이미 다 사라졌는지도. 어떤 점에서 이 글은 스스로 자신을 극복해 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던진 두 질문에 대한 답을 해 보자. 나는 아픈 몸을 낳은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가? 금지를 잘 지키면 인정받는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가? 내 답은 그렇다이다. 아픈 몸이, 사회적 질서가 진리라면 나는 세계를 긍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진리가 아니다. 세계에는 단지 진리화하려는 힘만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문제는 그 힘들이지, 세계가 아니다. 세계는 무고하다. 세계는 놀이의 장일 뿐이다. 애들이 운동장에서 뛰어 놀다가 다쳤다고 해서 운동장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운동장은 거기 있을 뿐이다. 운동장은 우리를 놀게 해 주고, 그것은 그 자체로 긍정적인 것이다. 니체주의자로서 나는 그렇게 세계를 긍정한다. '이까짓거 놀아서 뭐해'가 아니라, '좀 더 제대로 놀아 보자'.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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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라캉은 진화심리학이라는 것을 몰랐다. 과연 니체가 진화심리학을 접했더라도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헤겔적이라며 배척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니체의 권력의지, 상승의지는 진화심리학적 욕망과 많은 부분에서 겹치는 것 같은데. 라캉이 진화심리학을 접했다면? 그는 나처럼 A와 B의 '욕망의 이륜(C가 배제된)'을 구성했을까? 아니면 유전자적 욕망을 쪼개서 대타자쪽과 주이상스적 욕망 쪽으로 나눠 넣었을까? 니체파와 라캉파들이 진화심리학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도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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