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주의란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가?


이   진   경


1.방랑자와 유목민

왕가위의 영화 <동사서독>은 돌아다니고 방황하는 정착민의 군상을 냉정한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한결같이 떠도는 방랑자고, 일상적 삶에서 벗어난 탈주자며, 마을의 정착민들과 대비되는 위치에서 오고 간다. 하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은 그렇게 떠돌면서도 어느 한 곳에 붙박히듯 사로잡혀 있고 바윗덩이보다도 더 무거운 그 집착을 끝내 떨치지 못해 등에 진 채 방랑한다. 특히 주인공인 구양봉이 그렇다. 그는 실패한 사랑의 기억이라는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상처에 여전히 사로잡힌 채 멈추어 있고, 그것을 감추려는 듯 오직 돈으로만 목숨을 사고 파는 해결사의 냉담함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리고 있으며, “사막 가운데 살면서 사막 자체도 제대로 돌아본 적이 없”으며,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던 예전의 궁금증조차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누구보다도 더 고착된 과거의 기억 주변을 맴도는, 그러면서 끊임없이 정착할 곳을 그리는 떠돌이다. 거기서 탈주선은 끊어져 있고, 유목은 중단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유목의 공간 안에서 탈주자들을 다루고 있지만, 정반대로 그러한 공간조차 정착의 공간, 멈춤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고, 떠나도 떠나지 못하는, 상처에 고착된 사람을 보여주면서 끝나는 이 영화는, 머묾과 떠남이 공간의 속성도, 사람의 속성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떠돌아다니는 자들도 멈추어 있는 자들일 수 있고, 반대로 멈추어 있는 자들도 떠돌아다니는 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앉아서 하는 유목, 떠돌며 하는 정착. 떠남과 머묾은 공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어디서든지 새로이 시작할 수 있고, 어디서든지 변이할 수 있는 것이며, 새로운 삶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이며, 이를 위해 현재와 미래를 사로잡는 고착된 인연의 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그 끈을 풀어서 새로운 삶의 자원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2.정착과 유목

그렇다면 유목이란 무엇인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반면 정착은 한 곳에 머무는 것이고, 유목과 반대되는 것이다. 따라서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보면서, 혹은 여행을 즐기는 사람, 빈번하게 이동하는 사람, 그래서 지역적 국지성을 벗어던지고 코스모폴리탄적인 보편성을 획득한 사람을 보면서 ‘유목민’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다수를 점하고, 그런 이동과 소통, 여행과 횡단이 대대적으로 일반화된 시대를 보면서 유목주의란 개념의 현실성을 상기시키는 것도 자연스런 것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면 글로벌리즘globalism이나 지구촌화globalization에서 그런 유목주의의 강력한 징표를 찾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런 것은 유목을 오해하는 가장 흔하고 통상적이며 평범한 경우들일 뿐이다. 간단한 질문을 몇 개 던져 보자. 정착민은 이동하지 않는가? 유목민은 머물거나 멈추지 않는가? 세계 여행을 하는, 오늘도 공항을 메우며 푸른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저 많은 사람들은 정말 유목민인가? 끊임없이 여행하고 이동하면서도 집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가족의 안위에 대한 근심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삼일이 멀 새라 비행기를 타지만, 돈에 대한 걱정과 ‘성공’에 대한 집착을 단 한 순간도 놓아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반면 평생 좁은 연구실에 앉아서 에피쿠로스와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니체, 카프카, 캐롤, 로렌스, 그리고 노자와 도오켄을 넘나들며 읽고 사유하는 철학자는 어떤가? 소림사 뒷산 동굴에 앉아 9년을 면벽했다는 달마대사는 또 어떤가?
움직임과 멈춤, 이동과 정지는 정착과 유목에 대응되는, 그것을 정의하는 개념이 아니다. 굳이 그 말들을 사용하자면, 정착민은 멈추기 위해 이동하는 사람들이고, 유목민은 이동하기 위해 멈추는 사람들이다. 영토와 길 역시 정착과 유목에 대응하는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목민 역시 영토를 가지며(몽고 제국의 그 광대한 영토를 보라!), 움직이는 관습적인 경로를 갖기 때문이고, 정착민 역시 자신의 영토를 가지며, 그 영토 사이를 이동하는 길, 아니 도로를 갖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목민은 한 곳에 머문 채 이동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다른 세계, 다른 사유,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서. 그래서 토인비는 유목민을 오히려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고, 들뢰즈/가타리는 그 정의가 지극히 올바르다고 공감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목민은 물론 움직이지만 앉아 있으면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앉아 있는다.···유목민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안다. 그들은 무한한 참을성을 갖고 있다.”1)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앉아서 하는 유목’이란 개념을 즐겨 사용한다. 역으로 <동사서독>은 ‘돌아다니며 하는 정착’이란 개념 역시 충분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중요한 것은 유목민은 그때마다 하나의 영토로 영토화 내지 재영토화되지만, 이는 탈영토화에 종속되고 탈영토화하기 위해서만 그렇게 하는 반면, 정착민은 자신의 영토로 재영토화하는 한에서만 탈영토화를 수행한다. 유목민 역시 관습적인 경로를 가지며, 특정한 장소들이 마치 점과도 같이 그 경로를 결정하지만, 그 점들은 유목민 자신이 결정하는 경로에, 그 선 안에 엄격하게 종속된다. 오아시스는 나두고 떠나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반면 정착민은 그러한 경로를 영토로서 점에 종속시키고, 점과 점 사이를 연결하는 경로를 도로로 만들어버린다. 옆으로 샐 수 없는, 경직되고 폐쇄된 도로들. 그렇다면 “유목민은 이주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라는2) 들뢰즈/가타리의 주장을 이해하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유목적 궤적과 정착적 도로가 갖지 않다는 명제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좀더 심각한 오해는 유목과 방랑을 혼동하는 것, 더구나 전 지구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여행하고 그것을 하나의 촌으로 만드는 지구촌화와 혼동하는 것이다. 이런 혼동은 코스모폴리탄적 보편주의를 유목주의를 특징짓는 한 징표로 간주하는 혼동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유목 내지 유목주의가 그런 식의 보편주의에 反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래서 보편적 포괄성globalité에 대한 비판을 중요한 요소로 하고 있음을 안다면,3) 그러한 혼동은 유목주의에 대해 있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오해라고 하겠다.


3.유목주의와 전쟁기계

위에서 유목/유목민이 “무엇인지(What is?)”를 대략적으로 정의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유목과 정착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유목이 무엇이 아닌가를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유목주의가 무엇이 아닌가를 안다고 해서 유목주의가 무엇인가를 알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하지만 니체의 지적에 따라 “무엇인가?” 대신에 “어떤 것인가?(Which one is?)”로 대체된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유목주의란 대체 어떤 것인가?”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먼저 유목주의는 ‘전쟁기계’와, 따라서 ‘전쟁’과 결부되어 있다. 국가장치에 반하며 군사제도와 구별되는 한, “전쟁기계는 유목민의 발명품”이고, “유목민적 존재는 필연적으로 공간 속에서 전쟁기계의 조건들을 유효화”하기 때문이다.4) 앞의 것은 “전쟁기계는 국가장치에 대해 외적이다”라는 주장과 더불어 유목주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공리고, 뒤의 것은 이 공리에서 추론되는 중요한 명제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왜 유목주의는 ‘전쟁기계’와 ‘전쟁’에 대해서 말하는가?
유목은 다른 삶의 영토를 찾아, 다른 삶 자체를 찾아, 다른 사유, 다른 가치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이고, 그에 필요한 한 어디로든 샐 수 있고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앉아있는 자리에서조차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5) 찾아 끊임없이 탈영토화하는 삶 그 자체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하고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며, 그러한 삶에 부합하는 새로운 영토를 찾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유목은 창조와 생성(되기)이란 개념에 상관적인 구체적 개념이다.
반면 국가는 이와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그것은 어떤 것이든 규칙적이고 동일하게 반복되도록 고정하고 통합하며 ‘제도화’한다. 그것은 그렇게 고정된 것에 ‘질서’라는 이름을 붙이며, 그 질서를 당연시되는 도덕이나 가치, 규범, 의무와 권리의 형식으로 그 구성원에게 부과한다. 그리고 그러한 질서 아래 각각의 구성원이나 구성요소들(단체, 조직, 기관 등등)에 대해 ‘동일성’(정체성)을 부여한다. 물론 새로운 창조물이나 창안 역시 수용할 수 있지만, 그것은 국가장치가 구성한 질서 안에 적절한 위치로 재영토화될 수 있는 한에서고, 그 질서와 부합하는 의미로 포획되는 한에서며, 그러한 동일성을 유지하는 한에서다. 이런 점에서 국가장치란 ‘동일성’이라는 철학적 개념에 상관적인 구체적 개념이다.
따라서 주어진 것들을 새로운 배치 속에서 끊임없이 탈영토화시키고,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새로운 가치로 기존의 것의 동일성을 뒤흔들고 전복하는 유목주의는, 이미 그 자체로 고정하고 통합하며 동일화하려는 국가장치나 기존 체제에 반하는 ‘전쟁’인 셈이다. 유목이란 기존의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고, 그 창조에 의해 낡은 모든 것을 위협하고 파괴되도록 한다는 점에서, 유목민이 수행하는 전쟁은 파괴가 아니라 창조에 의해 수행되며, 어떠한 전투도 수반하지 않는 그런 전쟁이다. 요컨대 유목민은 창조하는 방식으로 ‘전쟁’하며, 따라서 유목민은 존재 그 자체가 국가장치에 대한 전쟁이고, 벤야민 식으로 말하면 ‘절대적 폭력’이다.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은 반드시 전투를 자신의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쟁과 전투가 어떤 조건 하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기계가 필연적으로 전쟁을 자신의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6) 마찬가지로 니체도 말했다. “좋은 전쟁에서는 화약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쟁기계란 이러한 창조하는 방식으로 수행되는 전쟁을 수행하는 모든 종류의 ‘기계’들을 지칭한다. 혁명을 꿈꾸는 칭기스칸의 기마대나 레닌의 조직-기계뿐만 아니라, 홍길동의 활빈당도, 혹은 카프카의 글쓰기-기계나 니체의 책-기계도, 뒤샹이나 베베른의 표현-기계도 모두 전쟁기계인 것이다. 유목민이,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 새로운 삶의 창조자가 사용하고 그가 만들어내는 것 모두가 전쟁기계인 것이다. 철학사에서 동일성의 철학에 대해 차이의 철학이, 존재(···임)의 철학에 대해 생성(···됨)의 철학이 수행한 전투, 과학사에서 국가적 과학(Royal science)에 대해 소수적minor 과학이 수행한 전투, 문학사에서 ‘대가’들의 다수적인major 문학에 대해 소수적인 문학이 수행한 전투, 예술사의 영역에서 왕립예술에 대해 소수적인 예술이 수행한 전투 등, 이 모든 전투에서 우리는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는 전쟁기계를 발견할 수 있다.


4.유목주의의 공간

전쟁기계로 활주하는 유목민은 마치 소용돌이처럼 사방을 동시에 점하면서, 여러 방향을 동시에 향하면서 나아간다. 가령 유목민의 궤적은, 정해진 경로를 가는 경우에조차 하나의 길을 그대로 밟아가지 않으며 언제든 옆으로 벗어나면서 간다. 그 궤적에 따라, 혹은 고유한 사정에 따라 가지 않던 길로 에둘러 갈 수도 있으며, 그 결과 때로는 유사한 환경을 갖는 전혀 다른 곳에 당도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물이 막히면 돌아가고 낲은 곳은 피하면서 흘러가듯이, 다양한 조건 속에서 삶의 흐름, 사람의 흐름이 흘러가는 대로 간다. 혹은 칭기스칸의 기마병들처럼, 번개와 같은 속도로 적의 후방을 점함으로써 그 사이의 공간 전체를 한꺼번에 장악한다. 다시 말해 유목민은 여러 지점을 동시에 점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유목민의 과학은 일차적으로 흐름을 다루는 유체역학과 같은 것이었다.
반면 정착민은 농사를 짓기 위해서든, 수해를 막기 위해서든 범람하는 물의 흐름을 결코 그대로 방치하지 못한다. 홈을 파고 수로를 만들어, 그 홈을 따라서만 흐름이 흐르게 한다. 사람들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반복적인 행로가 만드는 길의 형적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길에다 돌을 깔고 테두리를 둘러 도로로 만든다. 정착민은 공간에 울타리를 치고 홈을 파서 흐름의 범람을 막는다. 정해진 발원지, 정해진 목적지를 잇는 파이프나 수로, 도로를 만들고, 그 도로를 따라 이동한다. “정착적 공간은 벽, 울타리, 울타리 사이의 길들에 의해 홈패어진 반면, 유목적 공간은 매끄럽고 궤적들에 의해 지워지고 자리를 바꾸는 ‘자질’들에 의해서만 표시된다.”7)
정착민의 ‘홈 패인 공간espace strié’과 구분되는 이러한 유목민의 공간을 들뢰즈/가타리는 ‘매끄러운 공간espace lisse’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표상적 사유에 익숙한 사람들은 ‘홈패인 공간’이라는 말에서 선으로 이어지고 특정화된 공간을 떠올리고 ‘매끄러운 공간’이라는 말에서 데카르트 좌표로 표시되는 텅 빈 공간을 떠올린다. 하지만 모든 장소적 특이성singularité을 제거하고 범람하는 흐름을 순서쌍으로 표시되는 점들 사이의 기하학적 선으로 환원하며, 좌표축에 표시된 거리로 표시되는 단일하고 동질적인 척도에 따라 계산되는 데카르트 공간이야말로 홈패인 공간의 전형적인 사례다. 다시 말해 매끄러운 공간이란, 데카르트 공간처럼 어떤 척도에 의해 분할되고 척도에 따라 움직임이 분배되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 리만Riemann 공간처럼 하나의 척도를 갖지 않으며 척도 자체가 장소에 따라 가변화되는 그런 공간이다. 그것은 어떤 움직임도 점에서 점으로 이어지는 선(이 경우 선은 ‘홈’이 된다)을 따라 측정되고 계산되며 조절되는 연장적(延長的), 좌표적인 공간이 아니라, 방향을 갖는 무수한 힘들이 전체를 동시에 채우는 벡터장과 같은 공간이다.
두 가지 공간의 이원성을 좀더 분명하게 대비하자면, 홈패인 공간이 두 점 사이에 선이 있는 것과 반대로 매끄러운 공간은 두 선 사이에 점이 있다는 점에서 점에 대해 선이 우위를 점하는 공간이고, 홈패이고 척도적인 간격에 의해 닫힌 홈패인 공간과 달리 매끄럽고 방향성만 있는 열린 간격을 갖는 공간이라고 하겠다.
또 하나, 두 가지 공간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홈패인 공간은 구획하고 계산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를 두는 원거리 공간이라면, 매끄러운 공간은 신체로 직접 달라붙어 직접적으로 감응affect하는 근거리 공간이다. 따라서 전자가 주로 시각이 특권을 점하는 광학적 공간이라면, 매끄러운 공간은 시각조차 촉각처럼 만지고 직접적으로 느끼고 감응하는 촉감적 공간이다. 필리핀의 해상부족은 바다물의 온도와 물의 색깔, 물결의 흐름과 속도 등만으로 아무런 좌표나 척도라는 매개 없이 이곳이 어디인지, 누구의 해초‘밭’인지 직접적으로 안다. 에스키모는 아무런 척도도, 좌표도 없이 바람과 눈, 모래의 기복, 모래와 얼음의 촉감적 성질 등이 복합되어 만드는 특개성(特個性)haecceitas으로8) 위치를 안다. 대상을 지나치게 근거리에서 촬영하는 과잉접사는 광학적 시선의 흐름을 규제하는 투시법적 소실선의 홈을 짓이겨 시선이 동시에 사방으로 넘쳐흐르게 하며, 그렇게 사방을 동시에 점하는 시선으로 하여금 대상을 만지게 한다. 이럼으로써 가령 손의 형태와 윤곽은 사라지고, 묘한 느낌의 구멍이 숭숭 뚫린 기이한 질감의 표면이 된다.
따라서 홈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포괄적인 것le global과 국지적인 것le local의 대립을 비틀어버린다. 투시법이 잘 보여주듯이, 원거리상의 광학적인 공간은 지평선이나 배경과 같은 ‘포괄하는 것’l'englobant이 지배적인 지위를 가지며, 그 위에 상대적인 윤곽이나 형태가 등장한다. 절대적인 것은 중심이나 소실점처럼 특권화된 장소에만 할당된다. 그 점에서만은 시선이 모든 곳으로 향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에서 “이 특권적인 장소는 포괄적인globale 통합을 위협하는 어떤 것도 그 경계 밖으로 쫓아버리는 기능을 한다.”9) 즉 소실선을 침범하는 것, 소실선의 흐름을 깨는 방향으로 누운 것은 치워버리고, 모로 세워진 건물은 군대 말로 ‘각이 나오게’ 돌려놓아야 한다. 카피톨리네 광장을 사이에 두고 사다리꼴로 배치된 미켈란젤로의 건축물이 뒤페락이 그린 투시도에서 정확히 직각으로 ‘펴졌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방을 가득 채운 소실선들 사이에 사람들이나 가구들이 끼여 있고 갇혀 있는 클레의 ‘투시법적 방’은 특권화된 한 점으로 소실선을 모으며 포괄성의 여유 있는 지배공간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반면 매끄러운 공간은 촉감화된 공간이 그렇듯이 어쩌면 극도로 국지화된다. 그러나 바로 국지적 공간에서, 시선은 어디로든 향할 수 있는 절대적 위치(투시법에서는 소실점만이 갖는 특권적 위치)를, 그 공간 안 어디에서도 확보한다. 따라서 포괄적인 광학적 공간이, 특권적인 어느 점만이 모든 영역을 싸안는 포괄성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상대적인 포괄성global relatif’만을 갖는다면, 눈 가까이 달라붙어 국지적으로 제한된 촉감적 공간에서는 모든 지점이 동시에 어느 방향으로든 향해 움직일 수 있는 ‘절대적인 점’이 된다는 점에서 ‘국지적 절대성absolu local’을 갖는다.10)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홈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의 모델을 다양한 영역에서 찾아내고 있다. 가령 두 종류의 평행적 요소에 의해 짜여지며, 적어도 한 쪽 변은 한계지워지고 닫혀있는, 또한 앞면과 뒷면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직물이 홈패인 공간에 해당된다면, 일종의 반(反)직물로서 실의 구별이 없이 섬유의 엄킴과 압축으로 얻은 유목민의 펠트는 매끄러운 공간에 해당된다. 유사하게, 날실과 씨실로 짜여지는 뜨개질이 홈패인 공간을 이룬다면, 이질적인 직물을 아무 방향으로나 부가하면서 만들어가는 패치워크나 퀼트는 매끄러운 공간을 형성한다. 체스 내지 장기는 전선, 후방, 전투를 갖는 제도화되고 조절되며 코드화된 전쟁이고,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이동하는 홈패인 공간에서 진행된다면, 바둑은 전선도 없고 대치나 후퇴도 없으며 심지어 전투조차 없을 수 있는, 오지 영토화와 탈영토화만이 있는 전쟁이고,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되고 막힌 벽을 범람하고 뚫고 들어가며 공간을 ‘전체’로 장악하는 매끄러운 공간에서 진행된다.


5.유목주의는 무엇을 보증하는가?

정착민과 유목민을 가르는 차이는 이것만은 아니다. 특히 유목민의 예술과 관련해 정착민의 구상적인 선과 대비될 뿐 아니라, 기하학적 선과도 근본적으로 다른 유목민의 추상적 선이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큰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을 상술하기보다는 차라리 유목 내지 유목주의 자체에 관한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유목주의는 언제나 창조와 생성을 보증하는가?” 전쟁기계는, 매끄러운 공간은 우리를 동일성과 고착, 통제와 강압의 메커니즘들에서 구해내는데 충분한가?
답은 짐작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매끄러운 공간은 홈패인 공간과 섞이고 겹쳐지며, 그것에 포섭되기 때문이고, 전쟁기계는 창조적 능력을 상실했을 때, 그리하여 전쟁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파괴하며 죽음의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가령 바다는 전형적인 매끄러운 공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가장 먼저 홈패임의 요구에 직면했다.11) 위도와 경도의 두 축을 따라 격자들이 그려지고, 그 격자를 따라 그려지는 지도에 의해 바다는 좌표로 표시되는 홈패인 공간에 포개지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매끄러운 공간에 홈을 파는 방법의 모델이 되었다. 이 방법에 따라 이후 하늘도, 심지어 성층권도 홈패인 공간에 포개지게 된다. 반면 가장 홈패인 공간인 도시조차 유목민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에 따라 매끄러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또 전사들의 전쟁기계는 국가장치에 포획되어 군대가 되며, 이 경우 창조와 생성의 모든 계기를 상실하고 전쟁 자체만을, 혹은 전쟁의 ‘방지’를 목적으로 하는 파괴적 장치로 변환된다. 유목민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앗틸라나 칭기스칸과 정반대로 티무르는 유목에 반하는 환상적 전쟁기계를, 전쟁과 파괴를 일차적인 목표로 하는 그런 전쟁기계를 만들었고, 이를 위해 더욱더 거대하고 무거운 국가장치를 만들어야 했다.12)
유목주의와 전쟁기계, 매끄러운 공간이 그 자체만으로 자유의 공간을, 해방의 공간을 보증하리라고 믿어선 안 된다. 그런 틈에 어느새 주류화와 안정성을 미끼로 정착적인 욕망이 유혹의 손을 내밀고, 치열한 전쟁 뒤에 지친 신체를 사로잡는 국가장치의 촉수가 다가오고, 매끄러운 공간을 포획하려는 홈 패인 공간의 그물이 어느새 덮치기 때문이다. 또한 창조와 생성, 생산의 능력을 상실하는 순간, 전쟁기계는 탈주선을 죽음의 선으로 변형시키는 파괴기계가 되고, 유목은 불모적인 방황으로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전쟁기계를 작동시키고 매끄러운 공간을 만들면서도, 그 양자 사이의 이행과 결합을 놓치지 않는 것이고, 창조와 생성의 자유로운 공간, 해방적인 공간을 그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목과 전쟁기계, 매끄러운 공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그 자체로 해방적인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바로 거기서 활동은 창조력을 가동하고 전쟁조차 창조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며 기왕의 목표조차 재구성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창안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주나 매끄러운 공간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 없이는 어떠한 창조도, 어떠한 새로운 삶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위에서 뛰는 것이고, 그것을 만들며 나아가는 것이며, 그것이 변화되고 포획되는 시기와 지점을 포착하고 그러한 변환과 포획에 대처하여 새로운 삶과 활동을 창안하는 것이다. 탈주-유목-전쟁-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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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 Deleuze et F. 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 472쪽.(이진경 외 역, ꡔ천의 고원ꡕ, 2, 연구공간 ‘너머’ 자료실, 2000, 165쪽).
2) 같은 책, 471쪽(163쪽).
3) 같은 책, 474쪽, 617쪽.(166쪽, 285쪽).
4) 같은 책, 471쪽(163쪽).
5) F. Guattari et A. Negri, Nouvelle espace de liberté, 이원영 역, ꡔ자유의 새로운 공간ꡕ, 갈무리.
6) Deleuze et Guattari, 앞의 책, 518쪽(201쪽).
7) 같은 책, 472쪽(164쪽).
8) 아일랜드 출신의 중세 철학자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가 개체성을 파악할 때 사용한 개념으로, 이것이 다른 아닌 ‘이것’이게 만드는 요인들을 지칭하며, 그래서 영어로 번역할 때 thisness(이것임)으로 번역한다.
9) 같은 책, 617쪽(285쪽).
10) 따라서 지구화globalization로 유목적 공간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거의 정확하게 정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잘 알다시피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지구화는 자본이라는 특권적 위치에 대해서만 모든 곳을 동시에 향할 수 있는 권력을 제공하고 그 권력의 선 안에 다른 모든 것을 가두고 포획하려는 그러한 포괄성의 작동방식을 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11) 같은 책, 598쪽(269쪽).
12) 같은 책, 521-2쪽(204쪽).


 

'수유+너머'에서 퍼옴.
아 좋다. 이런걸 왜 이제야 보게 되는걸까.
노마디즘 천의고원 가자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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