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7월의 어느 날 밤, 아나벨은 바로 그런 정황에서 자신이 하나의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인간이 하나의 동물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자각하는 것은 먼저 고통을 통해서다. 하지만 사회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완전하게 자각하는 것은 <거짓말>을 매개로 할 때이다. 개별적인 삶은 사실상 이 거짓말과 혼동될 수 있다. 아나벨은 열여섯 살 때까지 부모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다. 미셸에게도 비밀로 하는 것이 없었다(그것이 아주 드물고 소중한 일이었음을 그녀는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그날 밤 아나벨은 몇 시간 만에 인간의 삶이 거짓말들의 끊임없는 연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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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는 터빈에 다다라 목이 잘렸다. 잘려 나간 머리는 소용돌이의 출구에서 몇 미터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곳은 풀밭이었다. 그의 두개골은 세로 방향으로 두 동강이 나 있었다. 하지만 풀밭에 떨어지는 서슬에도 다치지 않고 온전히 남아 있는 부분에는 여전히 의식이 있었다. 그는 곧 개미 떼가 뇌 속으로 몰려와 뉴런들을 먹어 버릴 것이고, 그럼으로써 자신은 의식을 완전히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은 개미 떼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한쪽눈으로 지평선을 살필 수 있었다. 풀로 덮힌 지표면이 무한히 뻗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백금빛 하늘 아래에서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빙빙 돌고 있었다. 그는 세상의 종말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가 알고 있던 세계는 종말에 다다른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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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의 목소리가 다시 갈라지기 시작했다.
"난 비열한 놈이었어. 난 내가 비열한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대개 부모들은 자식들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해. 그게 정상적인 길이야. 그런데 나는 내 젊음의 종말을 견딜 수가 없었어. 내 아들이 자라 나 대신 젊은이가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어. 내 인생은 망쳐 버렸을지언정, 내 아들은 제대로 살도록 도와주었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나는 다시 하나의 개인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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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펠라티오였다. 하지만 쾌감이 그리 강렬하지는 않았다(따지고 보면 그는 한 번도 강렬한 쾌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성적인 쾌감이란 어떤 사람에게는 강렬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런 것이거나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교육의 문제인가? 뉴런들이 접속되는 방식의 문제인가? 아니면 뭘까?). 그녀의 펠라티오는 쾌감을 준다기보다 감동을 주었다. 그것은 재회와 중단된 운명의 상징이었다. 아나벨이 펠라티오를 끝내고 돌아누워 잠이 들었을 때, 미셸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놀랍고 신기했다. 그녀의 몸은 탄력 있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더없이 매끄러웠다. 그녀의 허리는 아주 가늘고 엉덩이는 컸다. 젖가슴은 작고 단단하였다. 그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한쪽 다리를 밀어 넣고 그녀의 배와 젖가슴에 손을 하나씩 얹었다. 그 부드러움과 따뜻함 속에서 그는 다시 갓난아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곧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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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돌아온 뒤로 그들은 향수 광고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즐거운 순간들을 경험했다(몽마르트의 계단을 함께 오르기, 센 강의 다리 위에서 서로 끌어안고 있다가 갑자기 방향을 튼 유람선의 전조등 불빛을 받으며 꼼짝않고 서 있기 등). 또한 그들은 일요일 오후의 가벼운 말다툼과 시트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침묵의 순간과 삶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권태의 순간도 경험했다. 아나벨의 원룸은 빛이 잘 들지 않아서 오후 4시만 되면 불을 켜야 했다. 그런 어두운 분위기 때문인지 이따금 슬픈 기분에 젖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그들은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진정한 인간관계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느낌 때문에 그들의 한 순간 한 순간은 어떤 애절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대단히 소중하게 여겼고 서로에 대해 크나큰 연민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쩌다 뜻밖의 마법이 작용한 덕분에 그들 사이로 상쾌한 바람이 불고 찬란한 햇살이 비쳐드는 날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날보다는 그들 속으로, 그들이 딛고 있는 땅 위로 잿빛 그늘이 번져 가고 있음을 느끼는 날이 더 많았다. 그들은 모든 것에서 종말의 낌새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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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의 의식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인간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주 오래오래 줄기차게 자기들 나이에 대해서 생각한다. 일찍이 어떤 시대, 어떤 문명에서도 나이에 대한 생각이 이토록 집요했던 적은 없다. 현대인들 각자의 머릿속에는 미래에 대한 한 가지 단순한 전망이 들어 있다. 자기의 남아 있는 삶에게 기대할 수 있는 육체적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을 밑도는 때가 오리라는 전망 말이다(요컨대, 현대인들은 자기들 마음 속에서 계량기가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 계량기는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돈다). 사람에 따라 이르거나 늦거나 하는 차이는 있지만, 현대인들은 누구나 자기에게 남아 있는 쾌락과 고통의 양을 비교하는 때를 맞게 된다. 인생의 어느 고비부터 이런 성찰은 자살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 점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20세기 말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두 지식인 질 들뢰즈와 기 드보르가 자살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자살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 이유가 있다면 단 하나, 장차 자기들의 육신이 쇠퇴해 가리라는 생각을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의 죽음에 전혀 놀라지 않았고 어떤 논평도 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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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을 몇 년 동안, 때로는 몇십 년 동안 자주 만나다 보면, 개인적인 문제나 정말 중요한 화제를 회피하는 것이 서서히 버릇처럼 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더 좋은 기회가 오면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더 인간적이고 더 완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끝없이 뒤로 미루어지지만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인간 관계도 좁고 고정된 틀에 완전히 매여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그 기대는 몇 년 동안, 대로는 몇십 년 동안 유지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결정적인 사건(대개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서 이미 때가 너무 늦었음을 일깨워 준다. 우리가 품었던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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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란 우리가 그것에 관해서 갖고 있는 지식의 총합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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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셋째 주부터 외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변이나 근처의 숲으로 가벼운 산책을 나갈 수 있었다. 어느 해보다 청명한 날이 많은 8월이었다. 햇빛 찬연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늘엔 천둥비를 예고하는 먹구림 한 점 떠 있지 않았다. 어떤 종말의 전조로 여길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셸은 늘 그녀의 손을 잡고 걸었다. 그들은 종종 그랑 모랭 강변의 벤치에 앉았다. 강둑의 풀은 햇살을 받아 거의 하얗게 보였다. 너도밤나무들의 가지 아래로 짙은 녹색 강물이 남실거리며 끝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외부 세계에는 그 나름의 법칙들이 있다. 그 법칙들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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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의 형상으로는
별로 사랑하지 않았어.
아마도 태양과 우리 무덤에 내리는 비가,
바람과 서리가
우리의 고통에 종지부를 찍어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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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벨은 자기의 재를 부모님 집의 정원에 뿌려 달라는 말도 남겼다. 그 소원 역시 이루어졌다. 해가 설핏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먼지였다. 흰색에 가까운 먼지였다. 그 먼지가 마치 면사포처럼 장미나무들 사이의 땅바닥으로 살포시 내려 앉았다. 그때 멀리서 철도 건널목의 경보기 소리가 들려왔다. 미셸은 열다섯 살 시절에 아나벨이 오후마다 역으로 마중을 나와 자기 품에 달려들곤 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땅과 태양과 장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재가 떨어진 풀의 표면을 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인 사람들 모두가 말이 없었다. 아나벨의 어머니가 포도주를 내왔다. 그녀가 미셸에게 잔을 내밀고,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미셸, 원한다면 며칠 더 머물러 있어도 돼."
"아닙니다. 곧 떠나겠습니다. 일을 해야 하거든요."
그는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갑자기 몇 줄기 빛살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기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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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은 천천히 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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