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외전

from 소요유 2012. 11. 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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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마스터즈 관람기를 쓰고 나머지 이야기도 바로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꽤 늦어졌다. 다 까먹기 전에 적어야지.


그러니까 상하이에서 2박 3일을 꽉꽉 채워 있었는데, 앞의 2일은 오로지 테니스 관람에 초점을 맞춰서 구경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었다.

첫날은 8강 경기 끝난 후 상해 체육관까지 셔틀로 이동, 택시로 호텔 앞까지 왔는데 배가 너무 고팠다. 12시가 넘어서 편의점도 문을 닫았는데 조금 걸으니 약간은 으시시한 길이 나타났고, 거기엔 노점도 있고 상점들도 많이 영업 중이었다. 허름한 슈퍼에 들어갔는데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에 남자 두 명이 쪼그리고 앉아 있어서 살짝 겁을 먹었다. 뭐라더라 유럽풍 케이크라고 설명된 과자 하나와 미닛메이드 막 과육 들어간 거랑 오레오랑 들고 계산하려고 하니 남자가 완전 해맑은 미소로 일반 편의점 가격 정도를 부르길래 역시 뭐든 외관으로 판단하면 안되겠다는 생각까지는 안들었고 마음이 놓였다. 호텔로 들어가려는데 길에서 막 지글지글 고소한 걸 볶는 냄새가 진동했다. 아 저거 엄청 지저분해 보이는데 아 엄청 맛있어 보여 어쩌지 어쩌지... 하다가 지지고 볶고 계신 할아버지한테 그거 하나 나도요. 라고 한국어로 말했다. 난 분명 예과 때 중국어를 배웠는데!




오오 나왔다! 배가 너무 고파서 허겁지겁 먹기 시작.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느끼하고 짰다 ㅋㅋㅋ

아참, 이거 가격이 얼만겨. 그래서 처음에 조리중이었던 음식을 바로 앞에서 먹고 있던 청년에게 얼마냐고 영어로 물었다. 전혀 못 알아들었다. 부랴부랴 여행 책자를 꺼내서 중국어로 물었다. 6위안이란다. 후덜덜... 1100원 되겠다.



이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청년과 꽤나 오랜 시간의 대화를 통해, 그러나 꽤나 단편적인 정보만을 교환할 수 있었다. 유일한 대화 통로가 저 한자 필기밖에 없었으므로.. 게다가 이 청년 로동자야 나에게 간자체를 들이밀지 말거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전에 한중일이 같은 문자를 쓰고 교류할 때는 그 독음도 비슷했을 것 같다. 연암 박지원이 물론 중국어를 했겠지(?)만 몰랐더라도 청나라 여행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지 않았을까. 10년 전 유럽 배낭여행을 할 때 취리히 유스호스텔에서 일본인과 같은 방을 썼는데, 서로 짧은 영어로 힘들게 대화했었다. "야, 100년 전에 우리가 만났다면 중국어로 대화했을텐데 동양인 둘이 어설픈 영어로 이야기하려니 이것 참 위어드하다?"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던 기억.

암튼 저 청년의 이름은 류하이솅이었다. 명함에 한글로 써주니 엄청 좋아했다. 내 이름을 한자로 적어 주니 "난징유"라고 읽어줬다. 뭐, 원래 지명 남경을 난징으로 발음하니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둘째날이 밝았다. 음.. 좋아! 여기가 상해란 말이지... 언젠가부터 국내외를 막론하고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장소에 있을 때면 과거의 그 순간 순간들이 현재의 풍경에 겹쳐지면서 내 자신이 아득히 먼 시간들 속으로 녹아들어가 바타이유가 말하는 '연속성'을 획득하는 기분이 든다. 사실 '역사적' 임팩트가 가장 큰 사건이라면 역시 전쟁일테고 그런 전쟁의 기억과 상처가 보존되거나 혹은 진행형인 장소들이 아시아에 넓게 퍼져 있어서, 현재로선 여행 생각을 하면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보다는 그쪽에 무게가 많이 실린다. 그런 점에서 상하이도 많이 기대가 됐었다.





호텔 조식을 먹으러 나갔다. 레스토랑이 별관에 있었는데, 음식을 접시에 담아 밖으로 나가니 정원이 있었다. 

길게 놓인 수로엔 알록달록 잉어들이 서로 입맞추며 유영하고 탁자 사이 사이를 공작 세 마리가 뒷짐을 지고 거닐으니 조식을 받아든 선비의 마음 또한 평화로이 누그러지고, 붉은 차에 소젖을 부으니 그 향기가 코를 희롱하는구나. 

하며 감상에 젖을 무렵 직원이 빗자루를 들고 와서 뛰어다니며 공작새를 쫓아냈다. 걔넨 노는 곳이 따로 있었나 봄 ㅋㅋㅋ

 

자, 본격적으로 상하이 시내를 구경한 이야기를 써보자!

상하이에서의 삼일째. 딱 하루가 남아 있다! 비행기는 9시 20분에 뜬다! 7시 전까지 모든 일정을 끝내야 한다!

그래서 대충 세웠던 계획은 이렇다.

 

1. 숙소 근처 상해남역에서 지하철 3호선으로 홍교로역으로 이동, 레드타운 구경

2. 레드타운에서 택시로 타이캉루로 이동. 이 다음부터는 죽 걸어서 상하이를 발로 다 디벼보고 민낯을 확인하자!

3. 타이캉루 쇼핑 => 프랑스 조계지 => 신천지(상해임시정부 포함) => 동타이루 골동품 거리 => 인민광장 => 난징동루 => 와이탄 => (예원) => 난징시루 => 정안사

4. 정안사에서 공항 버스를 탄다.

 

음. 계획은 저랬다. 난 아직 젊고, 운동도 열심히 해왔으므로 이까짓 거 뭐 어렵겠어 싶었다. 근데 와이탄을 거닐면서 조금 벅차다는 걸 느껴 예원은 포기했고, 인민광장에서 난징시루역까지를 꾸역꾸역 걷다가 다리가 마비되려는 느낌이 들어서 바로 택시를 탔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정안사역이었는데... 굴욕적이었다. 

 


이게 나의 그날 궤적. 각론으로 들어가자.

상하이 가기 전에 검색을 해봤을 때 예술인 거리가 세 군데 있었다. 타이캉루, 모간산루, 레드타운. 그 중에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 레드타운이었는데, 붉은 벽돌들과 옛 공장들의 정취에 끌렸던 것 같다. 모간산루는 어떻게 하다 보니 일정에서 빠졌는데, 위치가 멀었거나 뭐 이유가 있겠지? 까먹었다.


 

음, 상하이 조각 공간이라는군?


 

입점해 있는 갤러리와 상점들. 아직 공사중인 곳도 많았고 빈 공간도 많았다.




 

뭐 이런 분위기. 아인슈타인 두상의 임팩트가 컸다.


 

가까이서 눈도 찍어 보고..


 

저거슨 만국각?


 

이걸 보니 진이정의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가 떠올랐다.


 

뭐 이런 것도 있고. 제목이 우(牛)기충천이던가 ㅋㅋㅋ


 

커피빈도 레드타운에 동화되어 이뻤다.


 

REDTOWN


 

예쁜 길.

레드타운 내부 갤러리, 상점들에 이쁜게 참 많았는데 처음 방문한 곳이라 자제하다 보니 아무 것도 건지질 못했다. 으으 너무 아쉽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이 좋았다.

 

 

이제 타이캉루로 가자. 택시를 타야 하는데, 뭐 하늘색 연두색 흰색 황토색 요런거 타라고 했는데 둘째날까지는 밤에 멀리서 오는 택시를 잡으니 무슨색인지 알 수가 있나. 이 날은 마침 황토색 택시가 오길래 잽싸게 잡아탔다. 확실히 쾌적했다. 저 파란 색 택시가 내가 이틀간 밤에  탔던 문제의 택시. 22위안 나왔는데 25위안 줬더니 날 보며 그냥 셰셰만 되뇌고 있었다. 꼭 3위안 받지도 못해놓고 애꿎은 다른 파란 택시만 저렇게 찍어 왔다. 너 인마, 너 친구 인마. 꼭 부자 돼라 너이색히들 화이팅.


 

여기가 타이캉루. 갤러리와 상점 밀집 지역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인사동과 삼청동을 합쳐 놓은 느낌. 외국인들 엄청나게 많고 분위기도 좋고 사고싶은 것도 많고 구경할 것도 많고 암튼 좋아 좋아.



한 공방에서 저 컵들을 발견하고 바로 질렀다. 화려한 도예품들 사이에 저 아이들이 전시돼 있었는데 너무 예뻤다. 그래서 들고 만져보니 허헉!! 매끄럽고 보드라워!! 존 메이어는 'your body is a wonderland'에서 여자의 피부를 도자기에 비유했지만 난 그저 여자의 피부를 만지는 느낌으로 컵을 계속 쓰다듬고 쓰다듬다가 점원의 접근을 눈치채고는 도도하게 구매 의향을 밝혔다. 포장을 너무 거하게 하는 바람에 가방(일반 백팩 하나 달랑 들고 간 여행이었다)에도 안들어가고 꽤나 거추장스러웠다.

 

타이캉루를 벗어나서는 걷기 시작. 프랑스 조계지 쪽으로 걸었는데 큰 플라타너스들이 양쪽으로 심어진 길이 운치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한국인의 필수 여행 코스, 상해 임시정부.


 

아가, 어느 문이 임시 정부 입구니?

"궁금해요? 궁금해요? 궁금하면 5위안."

너 이 꼬마녀석도 꼭 부자돼라. 그 탈것 부럽다? 위에 열리는 건 오이니 수세미니? 빨간 팬티는 엄마꺼니?

 

 

뭐 상해임시정부 내부는 인터넷에 사진 많으니 참고하시고, 내가 찍어온 건 광복군의 패기 쩌는 '대덕선전포고문'.

"본 정부는 연합국의 최종 승리와 세계의 화평과 안전을 착진키 위하여 덕국 희특력 정부에 향하여 선전을 포고한다 개객기들아!!"

는 희틀러에게 구글 번역기도, 광복군 인지도도 없으므로 실패!


 

내래 신천지로 왔디우.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한 거이 고조 별다방에서 아이스 바닐라 라떼 그란데 사이주 하나 빨아야 하겠디우. 연유를 모르겠지마는 "신천지" 하니 느낌이 영 유별나지 아니하간?

여기가 상하이에서 제일 잘 나가는 동네 맞지? 근데 사람이 너무너무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었다. 일요일이었으니..

신천지 근처 공원을 가로질러서 동타이루 골동품 거리로 향했다. 


 

공원에 아이들이 모여서 뭘 갖고 놀고 있었는데 보니 거북이었다. 기본 10센티미터는 넘었는데 어디 뒷산 계곡에서 잡아 온 남생이는 아닐테고 청거북이겠지? 


 

여기가 동타이루 골동품 거리.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고, 좀 쇠락한 느낌이었다. 가게마다 파는 것도 비슷하고 바가지도 심하고..


 

왓, 동인형이다! 나무를 깎아 만들었는데 자세히 보면 영 조잡하다. 비싸게 부를 것 같아서 가격 물어보지도 않았다. 진짜 괜찮게 만든 거 있으면 사오려고 돌아봤는데 없더라.


 

이게 내가 동타이루에서 사온 물건. 귀여워서 얼마냐고 물었더니 150위안(27000원 정도) 달란다. 본격 흥정 돌입. 깎다가 깎다가 자리를 뜨려고 하니 80위안 달라고 한다. 알겠다고 돈 주려고 하니 이건 쌍으로 둬야 한다고 같이 사란다. 처음 불렀던 150위안에 두 마리를 주겠단다. 오우 난 두 마리 필요 없다고 하나만 달라고 하니 오우 마이 프렌~~ 이건 두마리 세트로 둬서 장수를 기원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다시 흥정 시작 ㅋㅋㅋ 결국 120 위안에 두 마리를 사 왔다.
깎을 만큼 깎아서 샀지만 그래도 비싸게 산 것 같아서 마음이 찝찝했는데 나중에 푸동 공항에서 거의 비슷한 질의 두마리 세트를 800위안에 파는 걸 보고 극ㅋ복ㅋ!

부모님 갖다 드리면 딱 좋을 것 같다.

 

동타이루를 나와서 죽 걸어 올라갔다. 인민광장을 배회하면서 신선한 공기도 마시고 화장실 찾아 머나먼 길을 달리기도 했고..



 

그리고 접어든 곳이 난징동루. 인민광장과 와이탄을 잇는 거대한 상가? 이곳은 명동 느낌.

별다른 감흥은 없고.. 상가 많다해~ 사람 정말 많다해~ 아니 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아가씨 이쁘다해~

"안녕하세요?"

아 글쎄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건다! 내가 한국 사람인 걸 어떻게 알고! 내가 멋진 걸 어떻게 알긴 그냥 보면 알지.는 죄송합니다.. 아, 저게 나한테 사기를 치려는구나.. 싶어서 눈웃음 가볍게 날려주고 가던 길을 갔는데 또 모델같은 여자가 말을 걸어와서 또 무시함.

암튼 너희들도 꼭 부자 돼라.


 

와이탄 진입!

상하이 신호등은 저렇게 노란 불이 없고, 신호가 몇 초 남았는지 표시를 해준다. 그래서 참 이용하기 편하기는 개뿔 상하이에서 신호등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병신이지..



 

와이탄 맞은편으로 동방명주가 보인다.


 

아따 사람 많다~


 

와이탄은 강을 따라 저렇게 100년이 넘은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깨지고 강제 개항 당하면서 외국인들에게 내준 장소.

그 아픈 과거가 현재 이런 유산으로 남아 있다. 상하이를 다시 가게 된다면 높은 건물에서 와이탄 야경을 봐야겠지.

 

날이 좀 어두워졌고 몸도 피곤해서 예원은 제끼기로 하고, 이제 걸어서 정안사역까지 가면 되는데...

너무 힘들었다. 객기로 그래도 걸어서 가보자 했는데 난징시루역까지 걸었을 때는 다리가 더이상 움직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패배를 인정하고 다급히 택시!!!를 외쳤다.

 

근데 황당한 게, 정안사에 내렸는데 정안사 터미널 내지는 정류장이 보이지 않는 거다.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 그래서 또 계획을 변경해 지하철을 타고 롱양루역으로 가서 거기서 자기부상열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지하철로 롱양루역까지 가는데 자리가 안나서 그 아픈 다리로 계속 서있어야 했다. 죽을 맛이었지..



힘들게 힘들게 도착한 푸동 공항에선 마침 조코비치와 머레이의 결승이 방송되고 있었다.
음. 조코비치가 us 오픈의 복수를 상하이에서 하는구나..

 

촉박한 시간 동안 그래도 많은 걸 보고 느꼈다. 

상하이에 대해 짧게 총평을 하자면, 많이 발전했고 부유한 도시지만 그 부와 발전이 아직 사회 곳곳으로 퍼져 나가지는 못한 느낌이었다.

상하이 마스터즈라는 큰 행사를 매끄럽게 진행한 반면 관객들은 매너를 지키지 않았고(일례로 페더러가 지고 경기장을 떠나자 머레이가 인터뷰중이었음에도 우르르 나간 사람들), 경기장(시내 외곽) 근처의 잘 관리되지 않은 길 위로 번쩍번쩍 빛나는 롤스로이스와 폐차 직전의 차들이 함께 달렸으며, 공안 경찰들과 암표상들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묵과했고, 엘리트들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반면 일반인(택시 기사 포함)들은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으며, 거대한 빌딩 숲 아래엔 에티켓 없는 시민들과 사기꾼들이 넘쳐났다.

그렇게 약간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 상하이 여행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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