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 [알랭 바디우]

from 도서관 2009. 7. 20. 13:31


각각의 시대-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어떤 시대가 다른 시대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지만-는 자기 자신에 고유한 허무주의적 형상을 갖는다. 이름들은 바뀐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름들(예컨대 '윤리') 아래서 언제나 보수주의적인 프로파간다와 파국에의 음침한 욕망의 접합을 발견한다.
우리가 허무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보수주의에 의해 불가능하다고 선포된 것을 열망한다고 선언하면서이고, 무(無)에의 욕망에 대항하여 진리들을 긍정하면서이다. 모든 사랑의 만남, 모든 과학적 재정립, 모든 예술적 발명과 모든 해방의 정치적 계열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 보이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야말로 진리들의 윤리학-그 실질적 내용이 죽음을 결정하는 것인 '잘 사는 것'의 윤리에 대항하는-의 유일한 원리이다.


근본적으로 하나의 진리란, 사건적 잉여 부가가 상황 속에서 긋는 물질적 궤적이다. 따라서 진리는 내재적 단절이다. '내재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진리는 결코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진리들의 하늘이란 없다. '단절'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의 과정을 가능케 하는 것-사건-은 상황의 용법들 속에 있지 않고, 또 기존의 지식들로는 사고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진리의 과정은 상황 속에서 확립된 지식들에 이질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또는 라캉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진리의 과정은 그러한 지식들 속의 '구멍'이다.
우리는 충실성의 담지자, 즉 진리의 과정의 담지자를 '주체'라고 부른다. 따라서 주체는 결코 과정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는 사건이 생기기 '이전의' 상황 속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재한다. 우리는 진리의 과정이 주체를 도출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인식된 '주체'는 심리학적 주체나 심지어 성찰적 주체(데카르트적 의미), 또는 초월적 주체(칸트적 의미)를 포괄하지 않는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 예컨대 사랑의 만남에의 충실성에 의해 도출된 주체, 사랑의 주체는 고전적 도덕학자들에 의해 서술되는 '사랑하는' 주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심리학적 주체는 인간 본성으로부터, 열정의 논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반면 우리가 말하는 주체는 어떠한 '자연적' 선재성도 갖지 않는다. 연인들은 그들의 상태에서 하나의 사랑의 주체를 구성하지만, 사랑의 주체는 그들 각자를 넘쳐나는 것이다.


악이 존재한다면 악은 선으로부터 사고되어야 한다. 선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면, 즉 진리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면 선과 악이 아직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삶의 잔혹한 결백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이야기가 야릇하더라도 악은 절대적으로 진리들의 가능한 차원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악을 진리의 단순한 부재로, 선에 대한 무지로 간주하는 플라톤의 너무나 손쉬운 해결책에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무지라는 생각 자체가 파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있어서 진리가 부재하는가? 자신의 이해 관심의 추구에 열심힌 인간 동물에게 있어서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를 사회화시키는 의견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주체-불사의 존재-에게 있어서 진리가 결핍될 수 엇는데, 왜냐하면 충실한 도정으로서의 주체가 구성되는 것은 진리로부터이고, 오로지 진리에 의해서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록 악은 다양태적 존재의 한 형태로 식별되더라도, 선 그자체의 (가능한) 효과로서 출현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악이 존재하는 것은 진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러한 진리들의 주체들이 존재하는 한에서라는 뜻이다.
또는 악은, 존재한다면, 참의 힘이 뒤틀어진 결과이다.


...왜냐하면 악은 세 가지 이름을 갖기 때문이다:
-사건이 공백을 호출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적 상황의 충만성을 호출한다고 상상하는 것은 쉬뮬라크르 또는 테러로서의 악이다.
-충실성이 쇠퇴하는 것은 우리의 불사적 존재에 대한 배반 그 자체로서의 악이다.
-하나의 진리를 전능한 힘으로 간주하는 것은 파국으로서의 악이다.


...즉 사실상 모든 진리는 자신이 도출시키는 주체들의 구성 속에 '어떤 자'의 지속성을, 진리에 포획된 인간 동물의 언제나 이중적인 활동을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윤리적 '일관성'마저도 그 기원을 이해 관심에 두고 있는 끈질김이 충실성 속에 무관심적으로 개입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진리들의 전능한 힘을 설정하는 것은 그 진리들을 담지하는 것을 황폐화시키게 된다.
불사적 존재가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사멸적 동물 속에서이고, 사멸적 동물에 의해서이다. 진리들은 오로지 의견들의 피륙 속에서만 자신들의 개별적 창구를 열 수 있을 뿐이다. 우리들은 의사소통하고, 또 의견들을 생산해야 한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우리 자신들을 주체의 생성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 이외에 다른 역사란 없고, 도래해야 할 진정한 세계도 없다. 세계 그 자체는 참과 거짓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머무를 것이다. 선의 정합성에 포획될 수 있는 세계란 없다. 세계란 선과 악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고, 또 그렇게 머무를 것이다.
선은 세계를 좋게 만든다고 주장하지 않는 한에서만 선이다. 선의 유일한 존재는 하나의 개별적 진리가 상황에 도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진리의 힘은 또한 무력성이어야 하는 것이다.


윤리학은 따라서 '계속하시오!'라는 정언명령하에서 식별의 차원(시뮐라크르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과 용기(양보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유보(총체성의 극단성들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를 결합시킨다.
진리들의 윤리학은 세계를 권리의 추상적 지배하에 예속시키려고 하지도 않으며, 외적이고 근본적인 악에 대해 투쟁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진리들의 윤리학은 진리들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충실성을 통해 악-진리들의 이면 또는 어두운 면으로 파악된 악-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짜 이건,,, 짱이다. 짱. 왜 다들 바디우 바디우 하는지 알 것 같다. 나는 보통 독후감이나 써머리는 귀찮아서 중요하다고 생각되거나 인상깊은 부분이 있는 페이지는 접어 놓는다. 그걸 블로그에 타자하면서 복습하고,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근데 이 책은... 고작 100페이지 남짓한 소책자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 나니 저 모양이 돼 있다. 그만큼 밀도가 높다는 얘기. 다 타자할 수가 없어서 몇개만 했다. 저 파란색 글자 부분은 읽다가 눈물이 나왔을 지경.

얼마전에 막강공익님이 어떻게 자신의 니체적인 욕망과 권력의지를 파악해내고 실천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셔서 아래와 같이 어설프게 답했었다.
바람에 대한 비유 정말 좋네요^^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저도 잘 모르고.. 그 누구도 명확히 대답하기 힘들지 싶은데요.. 바람 속의 모든 바람들은 모두 스스로가 주가 되고 싶어하겠죠. 하지만 니체는 수많은 의지 중에서도 좋고 나쁜 것을 구분했던 것 같은데요. 넘침, 생성, 강함, 주인이 되려는 의지(모든 의지의 공통분모이기도 하지만)같은 것들 말이죠. 결국엔 언제나 멈추지 않고 생성-소멸-투쟁하는 의지들를 향해 '나'를 열어 두는 것, 그 사이로 유영하는 것이 답이 아닐까요? 각각의 의지가 어디서 비롯되어 무엇을 향하는지, 바람이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흐르려 하는지를 파악하고 언제나 그 힘들을 해체해내서 그것을 극복하거나 흐름에 편승하여 다시 여행을 떠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열어 두는 것'을 넘어 '내 모든 것을 걸 자신'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저도 구체적인 방법론은 제시하기 힘드네요. 그것 자체가 의지를 구속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좀 사변적이네요;;;

바디우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고 있다. 바디우에 의하면 동물과, 동물 인간에게는 선악이 주어지지 않는다. 선과 악은 오로지 주체화된, 불사의 존재로서의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바디우는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윤리학이 악에 기반해 진리와 선을 규정하고 있음을 꼬집는다. 그러나 어떤 것이 악이고, 그에 내가 가담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선의 지위를 획득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디우는 악이야말로 선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선, 진리란 '동물 인간'에서 '불사의 인간'으로 거듭남에 있다. 진리는 오로지 그 과정에서만 도출된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악은 불사의 인간이 동물 인간으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 악들은 시뮬라크르와, 배반과, 파국으로 범주화된다. 이 셋은 모두 진리화하는 힘을 무력화시키는 것이고, 역설적이게도 진리화 과정에서 파생된다. 이건 어떻게 보면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배반해야만 한다는 데리다의 '아나콜루톤' 이야기와도 흡사하다. 바디우의 충실성과 데리다의 충절. 그들은 말한다. 진리화 과정은 선이지만 그것이 굳어 버리면 악이 된다고.

몇 개의 의문도 남는다. 바디우에 의하면 각 분야에서 진리들은 단선적으로 출현한다. 그런데 만약 각기 다른 진리들이 동일 분야에서 동시에 출현한다면? 이를테면 현재 세계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어느정도 잠식되어 있지만, 이것은 바디우가 진리라고 바라봤던 사회 공산주의 혁명에 이어 도래한 진리가 아니다. 공산주의는 엄연히 자본주의체제하의 '의견들'이나 '이해 관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과연 그 시점에서 진리란, 진리 과정에 대한 충실함이란 무엇일까? 이것을 다시 사랑에 비유해 보자.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의 주체에게 다툼이나 혹은 다른 사람(다른 진리화 과정일지도 모르는)이 '사건'으로 기능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느 것에 '충실'해야 하는 것일까? 뉴턴 이전의 사람들에게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동시에 등장한다면, 과연 그 사람들은 어떤 진리에 충실해야 하는 것일까? 만약에 진리가 단선적으로 출현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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