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알베르 까뮈]

from 도서관 2007. 10. 30. 01:52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방인 - 알베르 까뮈


까뮈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겨서 읽었다. 한 10년만에 읽는건가. 역시 너무 좋다. 10년 전엔 훨씬 더 감격했었겠지.

뫼르소는 대타자적 욕망(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 타자에 대한 인정 욕망)에 얽매이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그를 사형으로 몰고 간다. 오히려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을 선고받기 전까지 어떻게 삶을 지속해 왔는지, 직장을 다니고 연애를 했는지마저 궁금할 지경이다. 그에게는 일정한 윤리 체계가 없다. 그에게 있어 모든 행동은 반드시 해야 할 이유도, 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어야 할 이유가  없기에 울지 않고, 마리의 청혼을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승낙한다. 여기엔 어떠한 대타자적 힘의 작용도 개입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판단 준거는 그의 '피로도'에 있는 것 같다. 그는 꾸준히 피곤하고, 이 신체 상태는 그의 정신과 행동을 지배한다. 어쩌면 그가 좀 더 건강했더라면 햇살이 덜 눈부셨을 것이고, 아랍인을 죽일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는 대타자의 부름을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단적으로 분열증적 욕망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난 자다. 그는 어머니의 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신다(사실 이런 일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특이한 일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대타자의 성격이다). 어머니의 장례식 다음날 해수욕을 즐기고 마리와 섹스한다. 그러나 그는 상대적으로 대타자적 욕망의 감수성에 있어서 취약하다. 분열증적 욕망을 따르는 것이 곧 사회에서의 추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분열증적 욕망과 대타자적 욕망, 그리고 유전자적 욕망의 배합에 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결국 사형을 선고받는다. 평론가들은 '이방인'에 대해 뫼르소가 거짓말을 몇 번만 했으면 충분히 살 수 있었다고 흔히 말한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말할 필요가 있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 사형을 선고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사실들을 다 밝히지 않은 이유는?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는 감옥에 면회온 마리를 보면서 그녀를 욕망하고, 감옥 밖의 별과 소리들, 밤 냄새, 흙 냄새, 여름의 평화, 뱃고동 소리를 욕망한다. 이러한 욕망들은 분명 사형될 처지에 배치되는 것이다. 그가 사형을 선고받게 되는 이유는 분열증적 욕망에 대한 과도한 감수성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대타자와 유전자에 대한 취약한 감수성 때문이다. 그는 너무 피곤했기에 대타자와 유전자의 부름을 해석해낼 기력이 없었다. 왜 그 욕망들이 작용하는지를 해석해낼 기력이 없었던 것이다. 대타자가 원하는(대타자가 수용할 수 있는, 대타자를 붕괴시키지 않는 한에서 사형을 면할 수 있게 하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사형당하지 않을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분열증적 욕망에 따르기 위해서는 대타자와 유전자적 욕망에 대한 해석이 요구된다. 그래야만 자신의 분열증적 욕망을 제어하고 구획지어 재창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그는 죽지 않고 마리와 사랑할 수 있고, 그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다시 살아 보고 싶어진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분명 분열증적 욕망이 대타자와 교감하는 부분이 있었다. 살라마르가 개를 잃고 슬퍼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떠올리고, 셀레스트의 애처로운 증언을 듣고 그를 껴안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그는 좀 더 대타자와 유전자에 대해 생각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조금 덜 피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조금 더 건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내 결론은 그렇다. 옛날에 '동물'이라는 소설에서도 썼지만(내겐 익숙한 테마다), 그냥 관조하고 비관하려면 죽으라는 것이다. 동물, 즉 '움직이는 물건'이고 싶다면 말 그대로 움직이라는 것이다. 비웃고 외면하기보다는 침뱉고 뺨을 때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아 가는데 더 도움이 되고, 내가 바라는 세계로 조금이나마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동물의 삶의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게 싫다면 그냥 죽으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가 뫼르소와 까뮈가 구분되는 지점이다. 뫼르소는 사형당하지만 까뮈는 '이방인'을 썼다. 뫼르소는 침묵했고, 사회는 그를 살릴 이유가 없었다. 또한 사회는 그만큼 변화할 가능성이 줄어 들었다. 분열증적 욕망은 표현되어야 한다. 그래서 대타자 내부에서 균열을 유도하고 내부에서 다양한 힘들을 소환해 내어야 한다. 혹은 대타자의 힘을 약화시켜 나가야 한다. 보다 많은 분열증적 욕망들이 사회내에 수용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다시 살아 볼 마음', 즉 창조적 생의 의지가 소설 후반부 사형 선고 후 생겨난 점이다. 그에게는 비로소 대타자적이고 유전자적인 감수성이 서서히 생겨나고 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대타자적 단두대뿐이다.




p.s.>
뫼르소는 레몽이 아랍인에게 총을 쏘려 하자 막는다. 아랍인이 레몽을 죽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까뮈가 말하는 반항은 이런 것이 아닐까? 반항은 자극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기능한다. 반면 사르트르적 혁명은 자생적이다. 물론 기원은 반작용일지 모르지만 반항이 단속적인 반면 혁명은 지속적이다. 바로 이것을 까뮈는 싫어하지 않았을까? 사르트르적 혁명은 억압에 대한 새로운 억압으로 기능한다. 즉 반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까뮈는 상대가 칼을 내려 놓으면 나도 총을 내려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맑스 혁명은 차르 체제하에서 레닌적으로 발생했지만 곧 스탈린적으로 변했다. 스탈린은 적이 칼을 아예 들지 못하게 손목을 자른다. 이런 혁명의 지속성, 맹목성을 까뮈는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반항하는 인간'을 읽어 봐야겠다. 그것도 안읽고 '까뮈는 이러지  않았을까?' 맨날 이러고 있다; 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