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死因)

from 분만실 2007. 10. 25. 21:47


          사인(死因)


삶이 없어
죽음을 불러 낸다.
죽고 나면 그 전은 삶이었을테지.

신호처럼 바람이 지나고 이어
먼지를 일으키며 멀리 죽음이 미끄러져 온다.
손에 솜뭉치를 가득 들었다.
내장을 발라 내고 박제를 뜰 모양이다.

파아ㅡ
파안하도록 대소.
두 팔을 열고 마주 본 속도로 달려
죽음을 맞는다.

휭ㅡ

다시 바람이 지나고.
멀리 죽음이 나의 자리에 섰다.
다시 그 만큼의 거리.
죽음이 있던 자리에 이제는 내가 서서
타는 갈증으로 몸을 떤다.

삶,
너 지고하고도 저열한 내 주검의 사인이여ㅡ


_2000년




<사족 해설>
재미 없어지겠지만 해석을 좀 달아 보련다(내 시에 내 해석이라니-_-). 재수할 때 쓴건데 그 이듬해 자비출간한 '두 스물'에는 싣지 않았었다. 그 후 상한론 숙제 하려고 공책 찾다가 습작 노트에서 발굴. 마음에 안찼었나 보다. 솔직히 너무 관념적인데다 말장난 같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이듬해의 나는 재수 시절의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삶이 없다는건 더 치열하게 살고 싶다는 것. 죽음을 불러 낸다는 것은 소극적(표면적) 의미로는 죽음과 다를바 없는 삶을 죽음과의 상대적 대비 속에서 의미를 갖게 하려는 것, 적극적(함의적) 의미로는 더 치열하게 살지 못할 바에야 죽는게 낫다는 것, 현재의 내 삶을 죽여버릴 각오로 살겠다는 것. 죽음이 나를 박제하려 한다는 것은, 뭐랄까 이상의 이미지를 소환한 것이랄까. 박제라는 것은 주검이 완전히 소진되지 않았을 때 하는 것이다. 이상이 박제된 천재로 불리는 것은 그만큼 천재성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죽음과 타나토스는 생의 기운을 박제하기를 원한다. 생의 에너지가 강렬한 박제물일수록 그것은 다른 생들에게도 타나토스의 위용을 과시할테니까.
나는 간절히 죽음을 원하는 듯하다. 그러나 죽음과 나는 중간 지점에서 멈추지 못한다. 죽음은 나를, 나는 죽음을 너무나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빨리 달린 나머지 우리는 가운데에서 손잡지 못하고 다시 멀어져 반대편에 서게 된다. 죽음은 다시 내 앞에 서 있다. 나는 죽음과의 찰나적 마주침으로 다른 삶을 얻었지만 이것은 아직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나는 현재의 내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치열한 삶을 원하며, 그렇기 때문에 결국 죽어도 죽지 못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죽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삶이 없다는 것이고, 따라서 나는 죽어 있는 것이며, 결국 간절히 원하는 '삶'은 내 주검의 사인이 되는 것이다. 나는 매순간 삶 때문에 죽어 있고, 삶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매순간 불타오른 주검으로 삶을 빚어 내는 아라비아의 불사조처럼 말이다. 불사조는 죽지 않는 새가 아니다. 불사조는 매순간 다시 태어나는 새다.
그래서 마지막 연은 이렇게 다시 쓸 수 있다. 죽음, 너 지고하고도 저열한 내 삶의 원천이여ㅡ

예상 리플: 꿈보다 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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