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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루시다 - 롤랑 바르트


구하기 힘든 책이다. 절판되었고, '밝은 방'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는데 '카메라 루시다'로 나온 버전이 더 좋다고 한다. 위에 올린 이미지 우상단엔 개정판이라고 적혀 있는데 내가 구한 책은 초판이라 어쩌면 '밝은 방'에서 상실된 '카메라 루시다'의 어떤 것의 존재를 상쇄시킬 만큼의 오역을 감당해야 했는지도 모른다(이런 문장 정말 싫어함. 문제는 이런 문장들이 바로 요 책에 많다는 점이다).

숀 호머의 '라캉 읽기'에 언급되길래 힘들게 구해 읽었다. 숀 호머는 스투디움을 상징계적 원리에, 푼크툼을 오브제 아(대상 a)에, 사진 찍힘으로 인해 사후적으로 존재했었다고 믿어지면서 그와 동시에 사라져 버린 어떤 것(이를테면 롤랑 바르트의 어머니)들을 실재계에 연결시키고 있다. 대단한 독해다. 그러니까 사진의 일반적 감상(스투디움) 사이에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불시에 찌르고 상처입히는 파편(푼크툼)이 존재하고, 그것은 존재했다고 믿어지지만 도달할 수는 없는 실재계에 대한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처음에 스투디움과 푼크툼에 대한 구별법을 설명한다. 그러나 책의 후반부에서 자신이 설명한 푼크툼은 또 진정한 푼크툼이 아니라고도 말한다. 설명될 수 있는 푼크툼은 푼크툼이 아닌 것이다. 설명될 수 있는 것은 내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므로 푼크툼이 아니고, 설명된다는 것은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푼크툼이 아닌 것이다. 그는 그에게 최초의 푼크툼을 불러 일으킨 사진(자신의 어머니가 6세 때 온실에서 찍은)을 공개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것이 푼크툼의 의미인 것 같다. 푼크툼은 말해질 수 없는 것, 말해서는 안될 것, 노자적인 도, 비트겐슈타인적인 말해질 수 없는 어떤 것이다. 한마디로,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은 우리의 푼크툼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는 카메라 루시다를 통해 말하지 않는 사진의 미학을 설명하고 있고, 이것은 바로 나의 사진관觀과 일치한다. (사진 작가가)말하지 않는 사진, 내게 (사진 스스로가)말을 거는 사진, 그러나 알아듣지 못할 언어를 구사하는 사진, 각각의 감상자에게 다른 말을 거는 사진(n명의 감상자, n개의 사진, n개의 언어). 나는 그런 사진을 원한다.

p.s.> 열화당에 직접 전화하면 구할 수 있다. 단 재고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장담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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