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from 소요유 2020. 6. 1. 17:21

외할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시다. 입원 중이신데 엄마는 매일 밤 병원에서 주무신다. 오랜만에 뵌 엄마는 목소리가 더 작아졌고, 몰라보게 수척해지셨다. 코로나 19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면회 했는데 그 때문인지 외할머니는 나와 동생을 제대로 알아보시지도 못했다. 엄마는 연신 내 이름에 기대며 손자도 운동을 좀 하라고 하지 않느냐, 일어서려고 노력하라지 않느냐며 역정을 내셨지만 할머니는 매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 어떤 이름으로도 할머니의 생의 의지에 불을 붙일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이름도 소용이 없었다. 할머니댁에 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골목 어귀까지 따라 나오셔서 투박한 손으로 내 손을 감싸며 다음엔 언제 오냐고 물으시던 모습이 선한데, 이번엔 잘 가라고 인사도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의 팔과 다리를 만져 보았는데 한 달 넘게 병상에 계셔서인지 근육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엄마의 뒷모습도 보았는데 눈물이 터질 뻔 했다. 엄마에게 나의 말이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날이 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셨던 말들이 기억 난다. 할머니는 온갖 이야기를 다 기억하고 계셨었다. 내가 어릴 때 했던 이야기들, 아버지께서 어릴 때의 이야기들, 할머니 자신이 어릴 때의 이야기들, 동네 사람들의 사소한 가십들까지. 내 몸을 손으로 가볍게 툭툭 치면서 끝없이 이야기를 하곤 하셨는데, 그 이야기들이 너무 좋고 소중해질 무렵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끝없이 펼쳐질 이야기들을 돌돌 말아서 혼자 지고 가셨다. 그 이야기들은, 그냥, 사라졌다.

최근에 '45년 후'와 '아무르'를 보았다. '윤희에게'도 봤구나. 사람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이야기들은 너무 많고, 사람들이 당연히 죽는 것처럼 이야기들도 당연히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그걸 견디기가 힘들다. 아무르의 클라이막스 장면에서도, 나는 주인공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변태스럽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는 한 사람의 세계다. 한 사람이 생을 지속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직조해 놓은 스스로의 세계. 우연과 부조리, 환멸과 회한으로 가득찬 날것의 세상에서 죽지 않고 버티기 위해 버릴 것은 버리고 휘어진 것은 바로 세우고 빈 공간엔 색칠을 한 한 사람만의 새로운 세계. 이야기가 사라지면, 부조리가 도래한다. 비로소 날것의 세상이 당도한다. 한 사람이, 한 이야기가 사라지면 남은 사람들은 그 사건으로 다시 이야기를 만든다. 남은 삶을 살아야 하니까. 수면 위의 이야기들과, 부표 아래에 매달린 가라앉은 이야기들, 그리고 흔적도 없이 심해로 떠나는 이야기들.

마흔이 된 나의 이야기들. 한데 묶일 수 없는 갈래 갈래의 이야기들. 이야기 중독자인 나는, 이야기를 버릴 용기가 없다.
"왜 낫지도 않고 죽지도 않노?" 할머니를 뵙고 와서도 그 말이 계속 마음 속을 휘젓고 다닌다. 나도 할머니와 같은 지점에 서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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