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아기>를 봤을 때 정상적으로 성장한 모든 남자를 사로잡는 그 정당한 혐오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잔인한 본성을 지니고 태어난 일종의 못된 난쟁이라는 ― 아이들에게 인간이라는 종의 잔인한 특성들이 즉각적으로 발현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가축들은 그들만 보면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다 ― 근거 있는 확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내부 깊은 곳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그 끝없는 고난에 대한 공포, 진정한 공포가 있었다. 동물 중에서 오로지 인간의 새끼만이 끊임없는 고통의 울부짖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즉각적으로 세상에 드러내는 것은, 물론 그가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그것은 실제적으로 기생 생물의 공격은 막지 못하면서 피부를 온도의 변화에 민감하게 만드는 털의 상실 때문일 수도 있고, 비정상적인 신경의 민감성, 어떤 구성의 결핍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공정한 관찰자에게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을 누리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것으로, 단 하나 가능한 그의 운명은 주변에 불행을 퍼뜨려 다른 이들의 삶을 자신의 삶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것으로 만드는 데 ― 첫 번째 희생자는 일반적으로 그 부모다 ―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류의 멸종에 앞선 몇 년 동안, 그것이 너무나 참혹한 경험으로 변해 버려서, 공공 보건 기구들이<출발>이라고 완곡하게 고쳐 부른 의도적인 죽음의 비율이 거의 100퍼센트에 육박했고, 전 세계적으로 예순 살로 평가된 <출발>의 평균 연령이 선진국의 경우에는 거의 쉰 살에 접근하기까지 했다.

이 수치는 평균 사망 연령이 훨씬 높았던, 그리고 노인의 자살이 아직은 그리 빈번하지 않았던 다니엘1의 시대에 겨우 시작된 길고 긴 진화의 결과였다. 하지만 망가지고 추하게 변한 노인의 몸은 이미 일반적인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현상에 대한 의식화가 시작된 것은 아마 살인적인 폭염이 프랑스를 덮쳤던 2003년 여름부터였을 것이다. 첫 수치들이 알려진 이튿날 '리베라시옹'지는 <노인들의 시위>라는 제목으로 그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단 2주 동안 프랑스에서만 1만 명 이상의 노인이 죽음을 맞았다. 어떤 노인들은 아파트에서 홀로 죽었고, 다른 노인들은 병원이나 양로원에서 사망했지만, 어쨌거나 모두 <보살핌 부족>으로 죽었다. 같은 신문은 몇 주에 걸쳐, 물로 열을 식혀 주거나 물 잔을 건네주는 사람 하나 없이 찜통 같은 공동 병실에 기저귀를 하나 달랑 차고벌거벗은 채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신음하며 죽어가는 노인들의 사연을, 바캉스를 떠난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속속 도착하는 환자들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시신들을 처리해 버리는 간호사들의 원무를, 강제 수용소에 버금가는 사진들을 곁들여 가며 전하는 참혹한 연속 르포를 게재했다. <현대 국가라는 말이 무색한 장면들>, 기자는 이렇게 썼다. 그 장면들이 바로 프랑스가 현대 국가가 되어 가고 있는 증거라는 것을, 진정 현대적인 국가만이 노인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로 취급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한 조상 경시는 아프리카나 전통 아시아의 국가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그리고 마지막 아침, 마지막 산책이 있었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렀고, 절벽은 여전히 검었으며, 폭스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뛰어다녔다. "폭스는 내가 데려갈게." 그녀가 말했다. "당연하잖아, 나랑 훨씬 더 오래 있었으니까. 하지만 원한다면 와서 데려가도 좋아." 극도로 문명화된 사람들.

모든 것이 이미 꾸려져 있었다. 그녀의 짐을 비아리츠까지 ― 그녀의 어머니는 전직 교사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를 극도로 멸시하는, 가진 건 돈밖에 없는 부르주아 여편네들이 득실대는 그 지역을 여생을 보낼 곳으로 선택했다 ― 옮기기 위해 그 다음 날 이삿짐 트럭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또다시 15분 동안 그녀를 공항까지 데려다 줄 택시를 함께 기다렸다. "삶은 금방 지나갈 거야......"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택시에 오른 그녀가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랬다, 이제 삶은 아주 고요해질 터였다.

 

...손과 발에서 가벼운 한기가 느껴진다. 그것은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다. 그것을 느낀 폭스가 낑낑거리며 내 발가락을 핥아 댄다. 나는 폭스가 죽어 교체되는 것을 이미 여러 차례 지켜보았다. 나는 감겨지는 눈, 아름다운 갈색 눈의 심원한, 동물적인 평화를 변질시키지 않은 채 멈추는 심장 박동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어떠한 신인류도 진정으로 그것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그것에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의도적으로 내 호흡과 정신적 투사의 리듬을 늦출 수 있을 뿐이다.

다시 해가 떠올라 정점에 도달한다. 하지만 한기는 점점 더 심해진다. 깊이 각인되지 않은 기억들이 잠시 떠올랐다 지워진다. 내 고행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걸, 내가 미래인의 본질에 한 몫을 하게 되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정신적 투사 역시 사라진다. 이제 아마 몇 분 정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아주 가벼운 슬픔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밤에, 에스더와 사랑을 나눈 후에(그것은 아직 잘 되고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아직 젊고 손상되지 않은 나 자신의 유일한 부분이었다), 달빛에 잠겨 있는 희고 매끄러운 그녀의 몸을 바라보며 나는 <거대한 엉덩이>를 떠올렸다. 마음이 아팠다. 복음서의 말씀에 따라 내가 사용한 잣대로 나 자신을 재야 한다면 나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거대한 엉덩이>에게 <매정하게> 굴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동정이 무엇에든 소용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가 연민에 이끌려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있다. 하지만 발기하는 것, 그건 불가능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날 밤 내 안에서 뭔가가, 에스더가 떠났을 때도, 이자벨이 자살했을 때도 버텼던 마지막 보호장벽 같은 것이 무너져 버렸다. 아마, 폭스가 하필이면 내가 삶의 이야기에 사라고사와 타라고나 사이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를 만났는지 서술하는 순간에 죽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단지 내가 나이가 들어 저항력이 약해졌기 때문이었을지도. 나는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한밤중에 뱅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눈물이 결코 마르지 않을 것 같았고,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한 일이 실제로 관찰된다. 나는 몇 몇 노인에게서 이미 그것을 관찰한 바 있었다. 때때로 그들의 표정은 차분하고 변화가 없다. 마음이 평화롭고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과 다시 접촉을 갖자마자, 의식을 차리고 다시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마자, 그들은 곧 다시 울기 시작한다. 부드럽게, 하염없이, 몇 날 며칠 동안 줄곧.

 

...사회성은 이제 끝났다. 그것은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인간의 지성이 막 출현한 시기에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지만 오늘날에는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인공수정이 일반화된 이후로 성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위, 그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누군가와 섹스를 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키스 리처드에서 자크 라캉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명 인사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내 삶, 내 삶, 아주 오래된 내 삶이여

이루어지지 않은 내 첫 소원

파기되어 버린 내 첫 사랑,

네가 돌아와야만 했다.

 

나는 알아야만 했다

삶이 가진 최고의 것을,

두 개의 몸이 그들의 행복을 연주할 때

끝없이 결합하고 다시 태어날 때.

 

전적인 의존에 들어간

나는 안다, 존재의 떨림을

사라지기 직전의 망설임을,

비스듬히 내리쬐는 태양을

 

그리고 사랑을, 모든 것이 쉬운,

모든 것이 순간에 주어지는;

시간 한가운데 존재한다

어느 섬의 가능성이.

 

 


 

이제는 아늑한 우엘벡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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