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


Slavoj Žižek

6.27 (수) 19:00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

 

 

한 세기 전 영국의 작가 길버트 키이스 체스터튼은 "철학자로 이루어진 특수 경찰대"를 창설하자는 모순적인 제안을 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이 제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철학 경찰이란 (중략) 평범한 형사의 업무보다 담대하면서도 동시에 미묘한 업무를 맡아야 합니다. 보통의 형사들은 술집에 가서 절도범을 체포하지만, 우리는 예술가들의 다과회에 가서 비관론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일반 형사들은 회계장부나 일지에서 이미 저지른 범죄를 포착해 냅니다. 반면 우리는 한 권의 소네트 집에서 미래에 저질러질 범죄를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종국에 인간을 지적인 광신주의, 지적 범죄의 길로 이끄는 이 무시무시한 사상의 근원을 추적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칼 포퍼, 아도르노, 레비나스처럼 다양한 사상가들도, 약간씩 다르게 표현되긴 했으나 이런 생각에 동참하지 않았겠습니까? 여기서 실제 저질러진 정치적 범죄는 '전체주의'이고, 그 배경이 되는 철학적 범죄는 '총체성(totality)'이라는 개념으로 압축됩니다. '총체성'이란 철학적 개념에서 정치적 전체주의로 가는 길은 일직선입니다. 여기서 '철학 경찰'의 업무란 플라톤의 '대화'나 루소의 사회계약론 등에서 향후 저질러질 정치적 범죄를 미리 파악하는 일입니다. 일반 정치경찰은 비밀결사를 찾아 혁명당원을 체포하지만, 철학 경찰은 철학 심포지엄을 찾아 총체성의 주창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일반 반테러리스트 경찰은 빌딩과 다리를 폭파할 계략을 세우는 이들을 찾아내려 하지만, 철학 경찰은 우리 사회의 종교적, 도덕적 토대를 해체하려는 이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독일의 시인인 하인리히 하이네도 1834년작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관하여"에서 이미 똑같은 식견을 표현한 바 있습니다. 물론 좀 더 긍정적이고 칭송의 뜻을 담아 표현하긴 했습니다만. "이 점을 명심하십시오. 긍지 높은 행동하는 이여, 의식하지 못하지만 당신은 지식인의 손발에 불과하다오. 지식인들은 별볼일 없는 은둔 중에도 당신의 모든 행위를 치밀하게 조직해 냅니다."

 
그렇다면, 이 노력을 우리가 지속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헤겔주의자로서 제 대답은 '예'이지만 체스터튼이 놓쳤던 약간의 비틀기를 섞은 '예'입니다. 우리는 기존 질서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 질서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식을 두드러지게 할 뿐입니다. '소유는 도둑질'이라는 프루동의 변증법적 표어를 떠올려 봅시다. '부정의 부정'이란 여기서 소유의 왜곡 행위(즉 소유의 "부정" 혹은 위반)로서의 도둑질에서 소유라는 개념 자체에 새겨진 도둑질로서의 측면(아무도 생산수단을 온전히 소유할 권리를 갖지 않으며, 생산수단은 본질적으로 공동소유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이것은 내 것'이라는 모든 주장은 부당하다)으로 생각을 전환하는 것을 뜻합니다. 똑같은 원리가 궁극적으로 자연 그 자체에도 적용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부정의 부정'이란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자연적 균형의 질서를 위반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균형의 질서라는 개념을 실재(the Real)에 강요하는 것 자체가 가장 중대한 위반이라는 생각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형태의 급진적 생태주의의 전제조건, 혹은 제1 격률이 '자연(Nature)이란 없다'인 이유입니다.

어떠한 개념의 왜곡에서 이러한 개념을 구성하는 왜곡으로 가는 이 같은 이행은 헤겔의 총체성 개념에 구현돼 있습니다. '총체성'이란 유기적 총체의 이상이라기보다는 비판적 개념에 가깝습니다. 즉, '어떠한 현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총체의 숨겨진 조화를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현상과 관련된 모든 '징후'와 대립, 비일관성을 통합된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헤겔의 총체성이란 본디 '자기모순적'이고 대립적이며 비일관적인 것으로 정의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로서의 '총체'(헤겔은 "das Ganze is das Wahre"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는 총체에 그 징후, 그 허위를 드러내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더한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필수불가결한 순간으로서의 위기가 자본주의의 '총체성'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프로이트에게 피험자의 '총체성'이란 주체의 공식적 이미지 속에 '억압'된 요소들을 나타내는 병리학적 증상을 포함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여기에 깔려있는 전제는 '총체는 결코 진정한 총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총체와 관련된 모든 개념에는 빠져있는 요소가 존재하며, 변증법적 노력은 말 그대로 이러한 잉여요소를 포함시키고 해명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징후는 기본적으로 건전한 시스템의 부차적 실패 또는 왜곡이 아니라, 시스템의 심장부에 무언가 '썩은'(즉, 대립적이고 비일관적인) 요소가 존재함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이 같은 점에서 헤겔의 총체성 개념이 중요한 세부사항을 놓쳐 균형을 망가뜨린다고 주장하는 모든 반(反) 헤겔적 수사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바로 헤겔의 총체성이 속한 공간은 ('추상적인') 총체, 그리고 총체에 의해 생성되었지만 총체에 대한 파악을 방해하는 세부사항 사이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다소 잔혹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범지구적 자본주의를 논하려면 콩고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콩고는 수천 명에 달하는 아동 병사들에게 마약을 투약시키고 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등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지만, 이를 바탕으로 범지구적 시스템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실업자 계층은 '노동 예비군'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넘어선 특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실업자 계층을 논할 때, 역사에서 낙오되었던 전세계의 수많은 국가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이들은 제 1세계 자본주의의 근대화 프로젝트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었으며, 가망이 없거나 구제불능인 경우로 평가절하되었습니다. 이러한 소위 '실패국가'(콩고, 소말리아)는 구시대적인 '인종간 증오'에 사로잡혀 있으며, 기아를 비롯한 자연재해의 희생양으로 자선 및 NGO 지원의 대상이거나 '테러와의 전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이 같은 자선의 대상과 테러와의 전쟁의 대상이 동일한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일시적 실업자는 물론 더 이상 취업이 불가능한 계층, 영구적 실업자, 빈민가 거주자 등 다양한 인구유형을 포괄할 수 있도록 실업자 계층의 범주를 확대해야 합니다(이들 모두에 대해 마르크스 본인은 '룸펜 프롤레타리아'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평가절하한 바 있습니다). 또한 마치 고대 지도의 빈 공간처럼 범지구적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배제된 지역, 인구, 국가도 이러한 범주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암시장과 빈민가에서 일하는 이들과 다양한 종류의 노예노동에 종사하는 이들 등의 '불법 취업자'를 고려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육은 받았지만 취업기회가 없었던 이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의 학생세대 전체가 교육수준에 걸맞는 취업기회를 거의 박탈당한 끝에 대규모 시위에 나선 상황입니다.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는 최악의 방법은 교육을 시장의 요구에 직접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시장의 역학 자체가 대학에서 제공하는 교육을 '구식(obsolete)'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취업길이 막힌 학생들은 곧 다가올 해방운동을 조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이집트에서는 물론 그리스에서 영국까지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시위에서도 이러한 학생들이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만으로 급진적 변화가 촉발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물론 원칙적으로 옳은 이야기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 부르주아 계층은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들이 '과연 누구의 입장에서' 기능을 상실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답은 '자본주의 자체'입니다. 즉, 옛날 자본주의의 이상이 스스로 조직, 운영하는 생산에 (자신이 보유한 또는 빌린) 자금을 투자해 이익을 얻는 기업가였다면, 오늘날에는 새로운 이상형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제는 기업을 소유한 기업가 대신 (역시 소유주가 아닌 경영자들이 운영하는) 은행 또는 분산된 투자자들이 소유한 기업을 운영하는 전문 경영인(이나 CEO가 주재하는 이사회)가 자본주의의 이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부르주아 계층이 없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이상형에서,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되는 옛 부르주아 계층은 월급을 받는 경영자로 다시금 기능을 확보하게 됩니다. 새로운 부르주아 계층은 급여를 받으며, 기업의 일부 지분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자신의 업무에 대한 보상('성공적' 경영에 대한 '보너스')의 일환으로 스톡옵션을 얻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부르주아 계층은 여전히 잉여가치를 전용하지만, 이는 밀너가 이야기한 '잉여급여'라는 (신비화된)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최소급여'보다 많은 돈을 받습니다. (이는 허구적인 경우가 많은 상상 속의 참조기준으로, 오늘날의 세계경제에서 이와 관련된 유일한 실제 사례는 중국이나 인도네시아의 노동착취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급여 정도일 것입니다). 일반 프롤레타리아 계층과의 이 같은 차이점이야말로 이들의 신분을 결정하는 요소입니다. 따라서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부르주아 계층은 사라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자본주의자들이 월급을 받는 노동자의 하위집단으로 재등장하고 있으며, 이들은 능력에 따라 더 많은 돈을 벌 자격을 갖춘 경영자들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보다 많은 돈을 버는 현상을 정당화하는 유사과학적 '평가'가 오늘날 중요해진 것입니다). 잉여급여를 받는 노동자 계층은 물론 경영자에게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며, 모든 종류의 전문가, 행정가, 공무원, 의사, 변호사, 언론인, 지식인, 예술가 등도 포함됩니다. 이들이 누리는 잉여는 두 가지 형태입니다. 하나는 (경영자 등의 경우)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부 지식인, 그리고 일부 중앙정부 행정가의 경우) 일하는 시간이 적어 자유시간을 보다 많이 누리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 노동자들에게 잉여급여를 수령할 자격을 부여하는 평가절차는 실제 능력과 큰 관계 없이 권력과 이데올로기로 중첩된 자의적 메커니즘입니다. 밀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잉여급여의 필요성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사회적 안정을 달성할 목적으로 '중산층'을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사회적 위계질서의 자의성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평가의 자의성이 시장 내 성공의 자의성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폭력이 촉발되는 것은 사회적 공간에 비상 상황을 유발하는 요소가 지나치게 많을 때가 아니라 이러한 요소를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입니다. 다소 심심하게 표현하자면, 바로 이러한 수준에서 위계질서의 사회적 기능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피에르 듀피는 열위에 놓인 이들의 입장에서 우열관계를 굴욕적이지 않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기능을 가진 네 가지 절차('상징적 배치') 중 하나로 위계질서를 설명합니다. 이 절차의 첫 번째 요소는 위계질서(hierarchy)입니다. 개인의 높은 또는 낮은 내재적 가치와 명확하게 대비되는 사회적 역할에 대해 외부적으로 강제된 질서를 의미하며, 따라서 개인의 낮은 사회적 지위는 자신의 내재적 가치와는 전적으로 별개의 개념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탈신비화(demystification)입니다. 우열관계는 실력주의 사회에서 확립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투쟁의 산물임을 증명하는 비판적, 이데올로기적 절차로, 여기에서 개인의 사회적 지위는 자신의 공적이 아닌 객관적 사회과정에 따라 결정됩니다. 듀피가 신랄하게 표현한 것처럼, 사회적 탈신비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평등주의적, 경쟁적, 실력주의적 사회에서 전통적 사회의 위계질서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의 우위가 그의 공적의 산물이라는 고통스러운 결론을 피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요소는 우연성(contingency)입니다. 앞에서와 동일한 메커니즘이지만 사회적, 비판적 예봉이 거세된 형태입니다. 사회에서 우리가 가지는 위치는 자연적, 사회적 추첨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우월한 기질을 가지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행운아라는 것이 그 요지입니다. 네 번째 요소는 복잡성(complexity)입니다. 여기에서 우열관계는 개인의 의도나 공적과 무관한 복잡한 사회과정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보다 성실히 일하고 훨씬 총명한 사람이라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함에 따라 자신은 실패하고 주변 사람은 성공하는 상황을 겪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이들 메커니즘은 모두 위계질서에 반하거나 위협하기보다는 오히려 위계질서를 공고히하는 역할을 합니다. '부러움이라는 혼란을 촉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행운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지 그와 정반대되는 생각이다. 이 같은 정반대되는 생각이야말로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뒤피는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자신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론을 도출합니다. 공정하며 스스로를 공정하다고 인식하는 사회가 원한을 사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대단한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로 이러한 사회에서 열등한 위치를 점한 이들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원한을 터뜨림으로써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랠 출구를 찾게 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중국이 겪고 있는 여러 난국 중 하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등소평이 추진한 개혁조치의 이상적 목표는 (새로운 지배층으로서의) 부르주아 계층이 없는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계층으로서의 부르주아 계층이 가져오는) 안정적 위계질서가 없는 자본주의가 영속적인 불안정을 초래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과연 어떤 길을 택하리라고 보십니까?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옛)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효율적인 경영자로 재부상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계층으로서의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역사적 적대감은 부르주아 계층이 없는 경영 자본주의로 가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경향성에 완벽하게 부합합니다. 두 경우 모두, 그 옛날 스탈린이 말한 바처럼 '성분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또한 오늘날의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흥미로운 차이점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대졸자들의 임금이 터무니없이 낮아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계층으로 전락한 반면, 중국에서는 대졸자들을 유순하게 길들일 목적으로 '잉여급여'를 충분히 지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잉여급여'의 개념을 바탕으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반자본주의' 시위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위기의 시대에 '허리띠를 졸라맬' 수 있는 최적의 후보는 월급을 받는 부르주아 하위계층입니다. 이들의 잉여급여에는 내재적인 경제적 역할이 없기에, 이들의 입장에서 프롤레타리아 계층으로 전락할 위기를 막을 유일한 방법은 정치적 시위입니다. 이 같은 시위는 명목상으로는 잔인한 시장논리에 대항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정치적인) 특권이 보장된 경제적 지위가 서서히 침해되는 상황에 저항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소설 <아틀라스 : 지구를 떠받치기를 거부한 신>에서) 아인 랜드가 즐겨 표현햇던 이데올로기적 판타지, 즉 파업에 나선 ('창의적') 자본주의자들의 판타지를 여기에서 다시 떠올려보고자 합니다. 자신들의 특권(최소급여 이상의 잉여가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특권을 가진 '월급제 부르주아 계층'의 파업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오늘날의 파업에서 이러한 판타지가 도착적인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들의 시위는 프롤레타리아적 시위는 아니지만 프롤레타리아 계층으로 전락할 위험에 대항하는 시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영구적인 직업을 가지는 것 자체가 특권인 오늘날에 감히 시위를 벌일 수 있는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섬유산업 등(의 사양산업)에 종사하는 저임금 노동자가 아니라, (주로 경찰, 사법 관계자, 교사, 대중교통 노동자 등 정부행정과 관련된) 보장된 직업을 가진 특권층 노동자일 것입니다. 학생시위의 새로운 흐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합니다. 이들의 주된 동기는 고등교육을 받은 후 평생 '잉여급여'를 더 이상 보장받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이 틀림없습니다.


물론 작년 한 해 동안 아랍권과 서유럽권, 월스트리트, 중국, 스페인, 그리스 등 세계 전역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발생한 시위를 월급을 받는 부르주아 계층의 반란으로 평가절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보다 훨씬 급진적인 잠재성이 내재되어 있기에, 각 사례별로 구체적인 분석을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 영국에서 진행중인 대학개혁에 저항하는 학생시위는 2011년 8월 영국에서 발생한 폭동과는 분명 성격이 다릅니다. 당시 학생시위는 소비주의적인 파괴의 향연으로 폭동은 소외된 자들이 진정으로 폭발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집트 소요의 경우 초기에는 월급을 받는 부르주아 계층(불투명한 미래 전망에 분노해 시위를 일으킨 교육수준이 높은 젊은이들)의 반란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순간이 있었지만, 이는 억압적 정권에 대항한 보다 규모가 큰 시위의 일부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위에 대한 저소득 노동자와 소작농 계층의 참여도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이슬람주의자들의 선거 승리는 원래의 세속적 시위가 가진 좁은 사회적 기반을 나타내는 또 다른 신호가 아닐까요? 여기에서 그리스는 특별한 사례입니다. 지난 수십년간 그리스에서는 EU의 재정지원과 차관을 통해 (특히 지나치게 규모가 커진 정부행정 부문에서) '월급을 받는 부르주아 계층'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탄생했습니다. 현재 진행중인 시위 중 대부분은 이러한 특권을 잃어버릴 위험에 대항하기 위한 것입니다.


더욱이 '월급제 부르주아' 하위계층의 프롤레타리아화에 따라 다른 계층이 반대급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최고경영자와 은행가들이 비합리적으로 높은 보상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이러한 보상은 미국에서 진행된 조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기업의 성과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기에 경제적으로 비합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처럼 과도한 보상의 대가로 경영자들은 하루 24시간 일에 매달리며 항상 비상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경향을 들어 도덕적인 비판을 늘어놓는 대신, 우리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더이상 자율적 안정성의 내재적 적정수준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시스템의 순환이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이를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진행중인 위기는 무모한 지출이나 탐욕, 효과가 부족한 은행규제 때문이 아닙니다. 1970년대 초반에 시작된 경제주기가 끝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니스 바로우파키스가 이야기한 '범지구적 괴물(Global Minotaur)', 즉 1980년대 초반부터 2008년까지 세계경제를 움직인 괴물 같은 동력이 탄생한 시기입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는 석유파동과 스태그플레이션 이외에도 수많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달러에 대해 금본위제를 포기하기로 한 닉슨의 결정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기본적 기능에 훨씬 급진적인 변화가 올 것을 나타내는 신호였습니다. 1960년대 말이 되자 미국 경제는 유럽과 아시아에 대한 흑자 재순환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흑자를 누리던 미국 경제가 적자로 전환했기 때문입니다. 1971년 미국 정부는 대담한 전략적 행보를 통해 이러한 쇠락에 대응했습니다. 점차 증가하는 미국의 적자를 해결하는 대신, '적자를 증대' 시키기로 한 것입니다. "그럼 적자는 누가 책임지나요?"라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답은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입니다.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유럽과 아시아에서 끊임없이 몰려오는 자본을 영속적으로 이전시킴으로써 미국의 적자에 대처할 재원을 대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적자는 "다른 사람들의 잉여재화 및 자본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진공청소기처럼"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처리방식'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불균형을 체화한 것입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일종의 전지구적 균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안정 및 지속적 성장과 유사한 성과를 창출해낼 수 있는 비대칭적 금융, 무역 흐름을 빠르게 가속화시키는 국제제도입니다. [중략] 이러한 적자에 힘입어 (독일과 일본,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 등) 세계 주요 흑자국들이 지속적으로 재화를 생산해냈고 미국은 이러한 재화를 흡수해왔습니다. 이들 국가의 전세계 수익 중 약 70%가 월스트리트로 향하는 자본흐름 형태로 다시 미국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본흐름으로 월스트리트가 한 일은 무엇일까요? 월스트리트는 유입된 자본을 직접투자, 주식, 신규 금융상품, 신형,구형 대출 등으로 변환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질서에 대한 엠마뉴엘 토드의 비전이 한쪽으로 편향된 것은 분명하지만, 제국으로서의 미국이 쇠락하고 있다는 진실의 소리는 부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미국의 무역적자 증가는 미국이 생산하지 않는 포식자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미국은 세계 각국에서 매일 유입되는 하루 1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활용해 자국의 소비를 충당하고 있으며, 이 같은 점에서 미국은 세계경제를 지탱하는 보편적인 케인즈적 소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것만으로도 오늘날 지배적인 위치를 점한 것으로 보이는 반(反) 케인즈적 경제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합니다). 고대 로마에 납부하던 십일조 세금(이나 고대 그리스에서 괴물 미노타우르스에게 바치던 제물)과 비슷한 이 같은 자본유입은 복잡한 경제 메커니즘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즉, 미국이 안전하고 안정적인 중심국가로서 '신뢰받고' 있기 때문에 아랍 산유국은 물론 서유럽 국가와 일본,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에 이르기까지 전세계 국가들이 미국에 잉여수익을 투자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에는 경제적 측면보다는 이데올로기 및 군사적 측면이 주로 작용하기에, 미국의 입장에서는 자국의 제국적 역할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영구적인 전시상황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만들어내 ('불량'국가와 반대되는) 모든 '정상'국가의 보편적 수호자로 스스로 자리매김합니다. 이에 따라 전 지구가 제 1세계, 제 2세계, 제 3세계라는 3개의 계층으로 구성된 보편적인 스파르타로 가능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제 1세계는 군사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강대국으로서의 미국, 제 2세계는 산업 및 제조를 담당하는 지역인 유럽과 아시아, 중남미 일부 국가(주요 수출국인 독일과 일본, 그리고 최근 급부상하는 중국이 여기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 제 3세계는 현대판 노예라 할 수 있는 나머지 미개발 국가들입니다. 이처럼 범지구적 자본주의로 인해 새로운 일반적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찬양으로 포장된 과두제(oligarchy)입니다. 평등과 보편주의는 실제 정치원칙으로서 설 자리를 점차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신 스파르타적 세계체제는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이미 붕괴되고 있습니다. 1945년 당시와 달리, 이제는 세계가 미국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미국이 세계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의 영향을 완전히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헤게모니의 힘을 보여주는 한 가지 신호는 바로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가장 가차없는 비판까지도 수용할 여유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환경을 무자비하게 오염시키는 기업, 자신이 속한 금융기관이 공적자금으로 연명하는 가운데 넉넉한 보너스를 챙겨가는 은행가, 어린이에게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하는 노동착취 현장 등을 고발하는 서적, 신문 기사, 방송보도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비판이 가차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틀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규칙처럼 되어 있습니다. 명시적으로 서술이 이루어졌건 그렇지 않건 간에, 언론의 압력, 의회요청, 규제강화, 경찰조사 등의 수단을 통해 자본주의를 민주화하고, 민주주의적 통제를 경제적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하지만 (부르주아) 국가에서 민주주의 제도의 틀은 아직까지 불가침 영역으로 남아있으며, 따라서 (세계사회포럼, 대안세계화운동 등)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윤리적 반 자본주의'조차도 이러한 틀에는 감히 도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핵심적 통찰이 그 어느 때보다도 유효한 것도 바로 이 시점입니다. 마르크스는 자유의 문제를 정치적 영역에서 주로 다루어서는 안된다고 보았습니다(자유선거가 이루어지는 국가인가? 사법부의 독립성이 보장되는가? 언론은 숨겨진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인권을 존중하는가?). 오히려 실질적인 자유를 실현하는 열쇠는 시장에서 가정에 이르는 사회적 관계로 구성된 '비정치적' 네트워크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변화는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생산과 관련된 사회적 관계의 변혁입니다. 민주적 선거를 비롯한 협의의 '정치적' 수단이 아닌 혁명적 계급투쟁이 여기에 수반됩니다. 우리는 재화의 소유구조, 공장 내 관계 등을 기준으로 투표하지 않습니다. 이 같은 문제는 정치적 영역에 속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일례로 은행에 대한 구조조정을 통해 은행을 대중의 통제하에 놓는 등) 민주주의를 경제적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만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면 이는 망상입니다. 이 영역에서의 급진적 변화는 법적 '권리'의 영역 밖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물론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민주적' 절차에서는 우리는 반 자본주의 성향이 아무리 급진적이라도 이러한 민주적 메커니즘을 통해서만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 메커니즘은 그 자체로 자본의 원활한 재생산을 보장하는 '부르주아' 국가의 도구로 기능하게 됩니다. 이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오늘날 궁극의 적은 자본주의나 제국, 착취와 같은 요소가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라는 바디유의 주장은 유효합니다. 민주적 메커니즘이 가능한 모든 변화에 대한 유일한 틀을 제공한다고 받아들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망상'이야말로 자본주의적 관계에 대한 급진적 변혁을 방해하는 주범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우리의 현주소는 과연 어디일까요? 다음과 같은 그람시의 유명한 표현이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시작된 시대를 가장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구세계가 죽어가고 신세계는 전면에 등장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지금은 괴물의 시대입니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야말로 20세기의 쌍둥이 괴물이 아니었을까요? 파시즘은 살아남고자 하는 구세계의 절박한 시도에서 파생되었고, 스탈린주의는 신세계를 건설하려는 의도로 진행된 잘못된 시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전공학적 통제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가진 기술영지적(techno-gnostic) 꿈으로부터 추진력을 얻어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괴물들은 어떻습니까?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발생 가능한 모든 결과를 고려해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신세계로 직통하는 통로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우리가 상상한 바대로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통로를 어떻게든 가로막고자 괴물들이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2011년은 위험한 꿈이 펼쳐지고 전세계적으로 급진적인 해방정치가 되살아난 한 해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각성이 얼마나 취약하고 비일관적인 것이었는지를 증명하는 새로운 증거가 하루가 멀다하고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좌절의 징후가 모든 측면에서 동일하게 포착되고 있습니다. 아랍의 봄을 이끌어낸 시민들의 열정은 어느새 절충과 종교적 근본주의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OWS가 워낙에 동력을 상실한 상황이라 경찰이 주코티 공원 등 OWS의 시위 장소를 초토화시킨 사건이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OWS의 내재적 동력 상실을 감춰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성의 간계(cunning of reason)'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이외에도 세계 전역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팔의 모택동주의자들은 왕정파 수구세력의 술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으며,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적' 실험은 점차 군사 독재자가 주도하는 포퓰리즘으로 비화하는 듯한 양상입니다. 이처럼 꿈이 시들어버리는 듯한 우울한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열정이 넘쳤던 숭고한 순간에 대한 향수와 자아도취가 섞인 추억을 간직하거나, 혹은 상황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이유를 시니컬한 현실주의자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것밖에는 우리에게 남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일까요?


가장 먼저 언급해두어야 할 점은 수면 아래로 불만이 점증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분노가 쌓여감에 따라 새로운 저항의 바람이 불게 될 것입니다. 2012년 봄에는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평온한 상황이 지속되었지만, 수면 아래로는 긴장이 점차 증폭되면서 조만간 일어날 새로운 폭발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막다른 길에 몰렸다는 절망감이 만연하면서 상황이 한층 악화되었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데다 지배층 엘리트들이 통치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상황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스와 스페인에서는 선거가 끝난 후에도 동일한 좌절감이 사라지지 않고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분노의 신호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저서 <아케이드 프로젝트(Arcades Project)>에서 발터 벤야민은 프랑스 역사가 앙드레 몽글롱(Andre Monglond)의 말을 이렇게 인용했습니다. "과거는 문학 텍스트에 자신의 이미지를 남겼습니다. 감광판에 조명이 남긴 이미지와 유사합니다. 이러한 표면을 현상해 완벽하게 살필 수 있는 것은 오직 미래뿐입니다." OWS 시위, 아랍의 봄, 그리스, 스페인의 시위와 같은 사건을 미래를 알리는 신호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건의 정황과 기원을 바탕으로 사건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실증주의적 관점을 뒤집을 필요가 있습니다. 급진적인 해방운동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이들 운동을 과거와 현재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분석하는 대신, 미래의 관점을 적용해야 합니다. 즉, 숨겨진 잠재성으로서 현재에는 휴면상태에 있는 유토피아적 미래의 제한되고 왜곡된(때로는 심지어 뒤틀린) 단편으로 이해하고 분석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들뢰즈는 프루스트를 인용해 "사람과 사물은 공간상에서의 위치와 다른 위치를 시간상에서 점한다"고 말했습니다. 악명 높은 마들렌 빵(Translator Note :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이 옛 기억을 떠올리는 계기로 작용함)은 공간상으로는 여기에 있지만 시간상으로는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에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공간상으로는 우리가 있는 여기에 위치하고 있지만 시간상으로는 공산주의적 이상에 등장하는 미래인 해방된 미래에 위치한 요소들을 적극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에서 인식하는 방법을 학습해야 합니다.


공산주의적 비전이 인간에 대한 위험한 이상화에 의존한 나머지 (이기심 등) 인간의 본성과는 동떨어진 일종의 '천부적 선량함'을 주창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니엘 핑크는 저서 <드라이브(Drive)>에서 일련의 행태주의 과학 연구논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 논문은 외부적 인센티브(금전적 보상)이 생산성을 저하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서 본질적 의미를 발견할 때 최적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루한 일상적 업무를 완수하도록 사람들을 독려할 때는 인센티브가 유용하지만, 지적인 도전을 수반하는 업무의 경우 민첩성과 혁신성이 개인과 조직의 성패를 크게 좌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업무에서 본질적 가치를 찾아야할 필요성이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핑크는 이러한 본질적 동기에 내재된 세 가지 요소를 파악했습니다. 첫째는 자율성으로, 어떤 업무를 어떻게 완수할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둘째는 숙련성으로, 어떠한 활동에 능숙해지는 과정을 일컫습니다. 셋째는 목적성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의미합니다. 다음은 MIT에서 진행된 어느 연구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이 연구에서는 학생을 한 그룹 데리고 가서 문제를 풀게 했습니다. 숫자열 암기하기, 단어 퍼즐 풀기, 공간 지각 퍼즐, 심지어 링 안으로 공 던지가와 같은 물리적인 과제도 있었습니다. 성취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기 위해 3단계의 보상을 제공했습니다. 그저 그런 성적을 낸 학생들에게는 적은 금전적 보상을 주었고, 중간 정도였으면 중간 금액의 보상을 제공했습니다. 최우수 학생들에게는 큰 금액의 현금을 상금으로 내걸었습니다. 그 결과는 이랬습니다. 기계적인 기술만을 요구하는 과제에 대해서는, 보너스는 기대했던 효과를 냈습니다. 즉, 금액을 많이 걸수록 성취도가 높아졌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초적인 수준이라도 과제가 인지적 기술을 필요로 하면, 보상이 클수록 오히려 성취도가 떨어지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우리는 경제학에서 보상이 높을수록 성과가 좋아진다고 배웠는데, 이 결론은 그에 반하는 것 같네요. 그리고 기초적인 인지적 기술로 넘어가게 되면 반대가 된다는 내용, 결국 보상이 효과가 없다는 것인데, 이는 뭔가 좌파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냄새가 납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것은 이상한 사회주의자의 음모에 불과할 겁니다. 여러분 중 이런 류의 음모론을 믿으시는 분들에게, 이 연구에 연구비를 지원했던 무척 악명 높은 좌파 사회주의자 집단이 누구인지 알려드려야겠네요. 바로 미연방준비은행입니다.


이 '이상한 행동'은 마르크스의 유명한 모토인 '필요에 따른 분배, 능력에 따른 노동'을 따르는 공산주의자의 그것입니다. 이 모토만이 '기부의 윤리(ethics of gift)'중 유일하게 조금이나마 유토피아적 측면에서 정통성을 갖는 것입니다. '포스트 모던' 자본주의는 물론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이러한 요소를 착취하는데 매우 능하며, 직원들의 '창의적인' 성취를 독려하기 위한 여유를 제공하는 모든 '포스트모던' 기업 뒤에는 그 진부한 무명의 노동계급 착취가 자리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날의 창의적 자본주의 아이콘은 '천재' 스티브 잡스가 떠받치는 애플 사입니다. 그렇지만 폭스콘 없이 애플이 있을 수 있습니까? 폭스콘은 수십만 명이 끔찍한 노동환경에서 아이패드와 아이팟을 조립하고 있는 중국의 대규모 공장을 소유한 타이완 기업입니다. 우리는 연구자 수천 명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있는 실리콘 밸리의 포스트 모던한 이 '창의적인' 센터의 이면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면이란 열악한 노동조건(장시간 노동, 저임금, 높은 심리적 압박)의 스트레스로 계속해서 자살이 발생하는 중국의 군사화된 기숙사입니다. 열한 명째 노동자가 고층에서 투신하여 사망하자, 이 기업은 몇 가지 대책을 도입했습니다. 자살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강요하기, 우울해 보이는 동료 노동자 신고하기, 정신건강이 악화되면 정신과 치료기관에 가기 등입니다. 설상가상으로, 폭스콘은 드넓은 공장의 빌딩 주변에 안전 그물을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폭스콘의 모기업인) 홍하이 그룹의 회장 궈타이밍(Terry Gou)이 연말 종무식 자리에서 자사 직원들을 동물이라 칭했다는 뉴스는 놀랍지도 않습니다. "동물 백만 마리를 관리하려니 머리가 아프다"라고 덧붙였다고 하지요. 궈회장은 이어 타이페이 동물원 소장인 친시치엔(Chin Shih-chien)으로부터 동물을 어떻게 잘 '관리'할 수 있는지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홍하이의 연례 사업검토 회의에 이 소장을 연사로 초청하여 부장 이상의 임원들에게 강연을 경청하라며, '우리를 위해 일하는 동물'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배우라고 했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예시가 갖는 문제가 뭐든 간에, 하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식 경쟁과 이익 극대화가 '자연스러운(natural)' 것이 전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정 수준의 기본적 생존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서면, 사람들은 공산주의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능력에 따라 사회에 주는 것이지요, 본인들이 받는 금전적 보상에 따라서가 아니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서 오는 징후를 주의해서 찾는 법을 배워야 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현재 나의 행동은 미래가 현재가 된 다음에야 비로소 읽어낼 수 있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사회 안에서 '공산주의의 발아'를 애타게 탐색하는 데 너무 많은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합니다. 미래에서 오는 징후는 칸트적 의미로 '구성적(constituitive)'이지 않고 '규제적(regulative)'이기 때문입니다. 그 상태는 주관적으로 중개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징후는 역사를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아무리 연구해 보았자 인지 가능하지 않으며, 오로지 참여적 입장에서만 관찰 가능하다는 것이며, 이 징후를 따르는 것은 파스칼적인 의미에서 '실존적 도박(existential wager)'입니다. 우리는 순환적 구조물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순환적 구조란, 수백 년 후 시간여행이 가능해진 시대를 상정한 SF 소설이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그 소설에서는 미래 시대의 어떤 예술비평가가 우리 시대 뉴욕의 한 화가의 작품에 매료된 나머지 그를 만나기 위해 시간여행을 통해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 화가는 하찮은 주정뱅이에 불과했고, 심지어 비평가의 타임 머신을 훔쳐서 미래로 탈출하기까지 합니다. 오늘날의 시대에 홀로 남은 예술비평가는 훗날 그가 매료된 나머지 과거로 여행을 결심하게 했던 바로 그 작품들을 직접 그리게 됩니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미래에서 오는 공산주의적 징후란, 우리가 이 징후를 따를 때에만 현실이 되는 하나의 가능한 미래에서 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 징후는 역설적이게도 징후가 뜻하는 바에 선행하는 것입니다. 숨은 신(deus absconditus)이라는 파스칼적 주제를 떠올려 봅시다. 찾는 자에게 인지 가능한 '숨어 있는 신(hidden God)'말입니다. 오로지 이 탐색의 길에 동참하는 이들만 이를 볼 수 있습니다.


신은 우리에게 기적의 형태로 징후를 주지만, 이는 모두에게 보이는 그런 것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만 보입니다. 의심 많은 비신자(파스칼은 이들을 부를 때 17세기에 흔히 그랬든 '리베르 탱(libertins)'이라 부릅니다. 대조적으로 18세기에는 이 단어가 주로 성적 타락(debauchery)'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들은 이 징후를 자연 현상이고 믿는 자들은 미신의 희생자로 쉽게 단정지어 버립니다. 여러 명민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오래 전 이미 파스칼의 논제가 몽매한 신학으로 회귀를 홍호하는 입장이 전혀 아니라, 참여하는 계급적 입장에서만 진리가 인지 가능한 마르크스적 개념의 혁명 이론을 가르키고 있음을 주지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날 우리가, 공산주의와 관련해 정확히 똑같은 상황에 처해있지 않습니까? '현시적 공산주의(revealed Communism)'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공산주의적 진실이 누구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한 것인 척, 중립적이고 이성적인 역사적 분석에 도달할 수 있는 척(혹은 그런 양 행동) 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적 '큰 타자(big Other)'란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을 인도하고 정당화할 고매한 역사적 필연성 혹은 목적론 같은 건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은 리베르탱(포스트모던 역사주의적 회의론자)이 득세하는 세상입니다. 그들에게 반박할 유일한 방법, 즉 오늘날과 같은 우연의 시대에 사건(the Event)의 (혹은 영원한 진리의) 차원을 주장할 유일한 방법은 일종의 숨은 공산주의(Communism absconditus)를 실천하는  것뿐입니다. 오늘날의 공산주의자를 정의하는 특성은 (현대적 버전의) '기적', 즉,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군중과 같은 예상 못했던 사회적 폭발력 속에서 그 공산주의적 성격을 가늠하게 해 줄 '독트린(이론)', 이것을 (공산주의적) 미래에서 온 징후로 읽어낼 수 있게 해 줄 독트린입니다(리버틴들에게 물론 이러한 대사건은 사회적 좌절과 허상에 의한 혼란의 결과이자, 그런 반응의 원인이 된 원래의 상황을 악화시킬 감정 분출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미래는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이 미래는 그를 지탱하는 주관적 참여에 의해서만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목도하였듯이, 좌파는 근원적 위기의 시대로 진입하였습니다. XX 세기의 그림자가 여전히 걷히지 않고, 패배의 범위조차 아직 완전히 인정하지 못한 채입니다. 번성하는 자본주의의 시대에는, 좌파들이 카산드라(역주 : 예언 능력이 있었던 그리스 신화의 인물) 흉내를 내는 것으로 족했습니다. 그 번영이 허상에 기반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다가오는 재앙을 예언하면 되었습니다.


이제 좌파들이 기다려 왔던 경기 침체와 사회적 해체가 도래하였고, 시위와 반란이 세계 전체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건에 대한 일관된 좌파적 응답이 명백하게 부재하며, 고립된 섬과 같은 저항의 혼돈을 어떻게 변화시켜 사회적 변화를 추동하는 긍정적인 프로그램으로 만들 계획이 부재합니다. 혹은 T.J. 클라크를 인용하자면, 클라크 : "현재의 상호의존적 글로벌 질서 속에서 국가경제가 위기에 빠지면, 비웃음 당하지 않을 정도의 상세함으로 '일국사회주의' 혹은 심지어 '부분적으로 분리된 유사-민족국가의 비금융자본이 이끄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는가?" 클라크는 좌파의 '미래주의(futualism)에서, 그 급진적 해방의 미래를 향하는 이 방향성 속에서, 행동하지 못하는 무능의 이유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정성 때문에 좌파는 '현재의 내장을 뒤져서 재앙과 구원의 징후를 찾느라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착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황제의 무덤에서 행진해 나가기만 기다리고 있는 테라코타 벽화의 군중'(역주 :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병용'을 가리킴, 진흙으로 만든 병사 인형)에 계속해서 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처럼 제대로 된 정치적 '대사건(Event)'의 가능성 자체를 잘라 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과도하게 단순화된 이 암울한 비전에 진실의 밀알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각성(Great Awakening)'의 신화를 이제 실질적으로 포기해야 합니다. (그 옛날 노동계급이 아니라면) 박탈당한 자들의 새로운 연대, 군중, 뭐가 됐든, 이들이 힘을 모아 결정적 개입의 주인이 되는 그 순간에 대한 신화 말입니다. 하트(Hardt)와 네그리(Negri)까지, (극)좌파의 역사 전체는 이 '결정적 순간(the Moment)'을 기다리는 입장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종말론적 기다림의 입장을 과감하게 포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프랑스어에는 '미래'를 뜻하는 단어가 두 개 있는데, 영어로는 제대로 번역이 어렵습니다. '미래(futur)'와 '도래(avenir)'입니다. 퓌뛰흐는 현재의 지속으로서 미래를 나타냅니다. 이미 현존하는 경향성의 완전한 실현입니다. 반면 아브니흐는 보다 급격한 단절, 현재의 단속(斷續)을 가리킵니다. 아브니흐는 아(a)와 브니흐(venir)의 합성어로 단순히 '향후 이렇게 될 것(what will be)'이 아니라 '이제 닥칠 일(what to come)'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묵시록적 세계의 상황 안에서, '미래'의 궁극적 지평선은 장 삐에르 뒤피(Jean-Pierre Dupuy)가 디스토피아적 '고정점(fixed point)'이라고 불렀던 것, 생태적 단절과 전지구적 경제 및 사회적 혼돈의 영점(zero-point)입니다. 이것의 도래가 무기한 미루어질지라도, 이 영점은 홀로 남겨진 우리의 현실이 향하는 가상의 '끌개(attractor)'인 것입니다. 다가오는 재앙과 싸우는 방법은 재앙의 '고정점'으로 흐르는 이 표류를 중단하고 '다가올' 급진적 타자성(Otherness)을 낳을 리스크를 스스로 지도록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래가 없다'는 슬로건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이 슬로건은 종결 혹은 변화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우리가 쟁취하고자 애써야 하는 그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재앙적 '미래'의 실현을 단절시키는 것, 그럼으로써 '다가올' 새로운 무언가를 위한 공간을 여는 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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