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손녀가 노인네들의 큰 관심사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은 이것을 자연의 순환법칙 또는 그 비슷한 무엇과 관련짓고, 그 사실만으로도 케케묵은 그들의 머릿속에 일종의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확실히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의미하지만,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일종의 부활이거나 복수다.


11월 초의 어느 날 오후 다섯시 무렵, 제드는 기느메르 거리에 있던 올가의 아파트 맞은편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올 것이 왔구나, 그는 혼잣말을 했다. 넋을 놓고 걷다가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몇 개월 남짓 매일같이 거의 비슷한 시간에 걸었던 길을 무의식중에 또 걷고 있었던 것이다. 숨이 멎을 듯했다. 뤽상부르 공원으로 발길을 돌린 제드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벤치에 무너지듯 앉았다. 그 옆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데다 모자이크로 장식된 괴상한 정자가 하나 서 있었다. 공원 한구석, 기느메르 거리와 아사스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였다. 멀리서 비치는 석양이 황홀하도록 아름답고 따사로운 오렌지 빛으로 밤나무를 물들였다. 인디언 옐로에 가까운 색이로군, 제드는 생각했다. <뤽상부르 공원>의 가사가 기억 속에서 절로 되살아났다.

     사랑 없는
     또 하루
     내 삶의
     또 하루

     뤽상부르는 
     나이가 들었네
     정말 나이가 든 건
     뤽상부르일까, 나일까?
     모르겠네

많은 러시아인들처럼 올가도 조 다생을 무척 좋아했었다. 특히 그의 마지막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을. 그 냉철한 체념이 어린 멜랑콜리를. 제드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쳤다. <안녕, 연인들이여>의 가사가 기억 속에서 떠오르자 그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별하듯 사랑을 했지
     내일을 생각지 않고 아주 단순히
     늘 조금은 너무 일찍 오는 내일을 생각지 않고
     때로 조금은 너무 쉬운 이별을 생각지 않고


"고료는 말씀드린 대로 만 유로로 책정했습니다. 제 화상인 프란츠 씨가 돈 대신 그림을 제안해도 된다고 하긴 했지만, 좀 난처하실 것 같아서요. 선생님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까다로운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일단은 만 유로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림이 더 좋으시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그림이라......" 우엘벡이 골똘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여하튼 집에 그림을 걸어둘 벽은 많으니까. 벽이야말로 인생에서 정말 내가 가진 유일한 거요."


그는 생각했다. 삶은 때로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만, 너무 비겁하거나 우유부단해서 그 기회를 덥석 움켜잡지 못하면 이내 거두어가버린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 행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어떤 순간이. 그 순간은 며칠 동안, 때로는 몇 주 혹은 몇 달 이상 지속된다. 대신 인생에서 단 한 번, 꼭 한 번뿐이다. 나중에 아무리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려 해도 불가능하다. 더이상 열정과 신뢰와 믿음을 위한 자리는 없고, 희미한 체념과 서로를 향한 서글픈 연민과 뭔가 일어날 수도 있었으리라는 적확하고 무의미한 감정만이 남을 뿐, 우리에게 주어졌던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만 증명한 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작가가 커피포트와 마카롱과 자두 술을 담은 쟁반을 들고 와서말했다. "콩트가 이런 말을 했어요. '인류의 구성원은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많다.' 내가 요새 그 말을 뼈져리게 실감하고 있지, 죽은 자들과 더 교류가 활발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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