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피에르의 이론은 사회 혁신이 없는 곳에는 정치권력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특정한 사회 유형, 특수한 정치권력의 양식에만 적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준다. 즉 강제 혹은 폭력으로서의 정치권력은 사회 내부에 혁신, 변화 그리고 역사성의 동인을 갖추고 있는 역사적인 사회들의 표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비강제적 정치권력을 지닌 사회는 역사 없는 사회이고 강제적 정치권력을 지닌 사회는 역사적인 사회라는 새로운 기준에 따라 다양한 사회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배열할 수 있다. 이러한 배열은 역사 없는 사회들을 권력 없는 사회로 취급하는 권력에 대한 현재의 사고와는 매우 다르다.
그러므로 혁신은 강제의 기초일 뿐이지 정치적인 것의 기초는 아니다. 따라서 라피에르의 연구는 비강제적 권력의 기초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쪽 연구일 따름이다. 좀 더 간결하고 정확한 형태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정치권력이 존재하는가? (강제가 없는 상태에서)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정치권력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이 질문에대답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우리는 지금까지의 설명들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이유와 적절한 설명을 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 결국 이것은 지역을 한정한 정치 인류학이 아니라 일반 정치인류학의 임무를 정의하기 위한 시도이다. 그 임무는 다음 두 가지의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정치권력은 무엇인가? 즉 사회는 무엇인가?
2) 비강제적 정치권력으로부터 강제적 정치권력으로의 이행은 어떻게 발생하고 왜 나타나는가? 즉 역사는 무엇인가?
인디언 추장제의 두 번째 특징인 관대함은 의무 이상의 것이며 오히려 추장을 속박하는 성격을 지닌다. 실제로 민족학자들은 남아메리카의 많은 사회에서 추장에게 부여된 주어야 할 의무가 인디언들에게는 추장을 끊임없이 약탈할 수 있는 권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불행한 지도자가 자기 물건이 없어지는 것에 대해 연연해하면 그 즉시 모든 위신과 권력은 실추된다... ...레비스트로스가 기술한 남비콰라족의 경우도 비슷하다. "새로운 추장의 인기는 그가 얼마나 관대한가에 따라 결정된다." 때때로 반복되는 요구에 화가 난 추장은 "전부 바닥났어! 더 이상 줄 것이 없어! 누구든 내 대신 추장을 해봐라!" 하고 소리친다.
...달리 말하자면 이러한 권력에 대한 거부에 자신의 전부를 거는 것은 자연에 대한 주요한 차이로서의 문화 그 자체이다. 그리고 문화가 일정하게 거부를 표명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가 아닌가? 거부에 대한 이 동일성으로부터 우리는 이들 사괴가 권력과 자연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문화는 권력과 자연 모두에 대한 부정이다. 그것은 자연과 권력이 문화라는 제3항에 대해 동일한―부정적인―관계만을 공유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위험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화가 권력을 자연의 재출현으로 파악한다는 의미에서의 부정인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사회들은 자신의 정치영역을 어떤 직관에 따라 구성했고, 그 직관은 사회에서 규칙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즉 권력은 본질적으로 강제적이고, 정치 기능의 통일을 향한 활동은 사회 구조라는 기초 위에서 그리고 사회 구조에 합치하도록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고 사회에 적대적인 피안으로부터 사회에 대항하여 행사되며, 권력은 본질적으로 자연의 은밀한 드러남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사회는 정치권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능력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권력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데 놀랍도록 능숙했던 것이다. 그들은 권력의 초월성이 집단에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외재적이고 스스로 정당성을 창출하는 권위라는 원리가 문화 자체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위협에 대한 직관이야말로 그들의 정치철학을 깊이 있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문화 영역을 제약하는 두 가지 한계인 권력과 자연의 엄청난 유사성을 발견함으로써 인디언 사회들은 정치적 권위의 독성을 중화하는 수단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정치적 권위의 설립자가 되었고, 권력이 출현하면 그 즉시 억제하는 부정성을 견지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권력은 (문화에 대한 부정이라는) 자신의 본질에따라 만들어진다. 그런데 권력은 사회에서 그 권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행사된다. 정치영역을 구성하는 운동이 또한 정치영역의 전개를 막는다. 이렇게 해서 문화는 권력에 대한 대항 수단으로 자연의 계략 자체를 이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추장을 가리켜 여성, 언어, 재화의 교환을 파괴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지 여기에서 명확하게 해두고 싶은 것은 사냥꾼-수확물, 남편-아내라는 두 관계의 형식상의 동일성이다. 음식 금기와 여성의 부족은 각기 고유한 영역에서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즉 사냥꾼의 상호 의존을 통해 사회라는 존재를 보증하고 여성의 공유를 통해 사회에 지속성을 부여한다. 지속적으로 사회구조를 창출하고 재창출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성격을 지닌 이들 기능은 남자와 수확물 그리고 나자와 아내 사이에 정확히 말해서 사회가 파로들 거리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인 차원도 지닌다. 그리고 사실 수확물의 증여, 아내의 공유는 각각 문화라는 구성체를 떠받치는 3가지의 기초 중 2가지, 즉 재화의 교환 및 여성의 교환과 관련되어 있다.
...즉 언어 활동은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는 것, 인간은 언어 활동과 완전히 대등해질 수 있다는 것, 현대의 서구는 언어 활동을 남용함으로써 그 가치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문명화된 인간의 언어활동은 인간에게 있어 완전히 외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에게 단순한 소통과 정보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의미의 질과 기호의 양이 반비례한다. 반대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보다도 칭송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진 원시 문화는 이미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과의 연대인 언어활동과 내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원시인에게 있어 시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언어활동 자체가 말의 가치를 지닌 자연스러운 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서 구아야키족의 노래를 언어 활동에 대한 공격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이제부터는 오히려 그것을 언어 활동을 보호하는 피난처로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유랑하는 가엾은야만인이 주는 언어 활동의 올바른 사용 방법에 대한 너무나 강렬한 가르침에 아직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따라서 원시 사회가 생계 경제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기술적인 노하우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진짜 물어야 할 것은 이들 사회의 경제가 과연 생계 경제인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우리가 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면, 생계경제란 시장이 없고 잉여 생산이 없는 경제―이는 단지 자명한 진리인 차이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라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실 이런유형의 경제는 그 사회의 존속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과, 그 사회는 그 사회의 구성원에게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제공하기 위해 항상 생산력의 총체를 동원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원시 사회의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언제나 식량을 찾아다녀야만 하는 동물적인 상태에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매우 짧은 시간만 일하고서도 생존―아니 그 이상―을 확보하였다. 이것은 원시 사회가, 원하기만 한다면, 물질적 재화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상식적으로 그들 사회에서는 왜 하루 서너 시간의 활동만으로도 집단의 필요가 충족되는데 좀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생산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들이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좀 더 일하는 것은 집단에 어떤 이점을 주는가? 그렇게 하여 축적된 잉여는 어떤 쓸모가 있는가? 그 잉여를 사용하는 것은 누구인가? 인간이 자기의필요 이상으로 노동하는 것은 언제나 강제에의해서이다. 그런데 그러한 강제가 원시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외부적인 힘이 없다는 것이 원시사회의 본질을 규정한다.
대다수 사회의 수렵에서 농업으로의 이행과 몇몇 사회의농어에서 수렵으로의 반대되는 이행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그것은 이러한 변동이 사회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지 않고도 이루어진다는 것, 사회의 물질적 생활조건이 완전히 변화하는 경우에도 사회 자체는 변화하지 않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신석기 혁명이 당시의 인간 집단의 물질 생활에 커다란영향을 미쳐 생활을 편하게 해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계적으로 사회 질서의 전복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바꾸어 말하면 원시사회들에 관한 한, 맑스주의자들이 경제적 하부구조로명명한 수준에서의 변화는 정치적 상부구주에 '반영되어' 그것을 규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후자는 물질적 기초로부터 독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사레는 경제와 사회가 서로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이동 생활을 하는지에 상관없이 수렵-어로-채집민 집단은 그들과 이웃한 정착 농경민들과 똑같은 사회-정치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상이한 하부구조'에 동일한 '상부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결정적인 것은 분명 정치적 단절이지 경제적 변화가 아니다. 인류의 선사시대에 일어난 진정한 혁명은 이미 존재하는 사회조직을 그대로 온존시킬 수 있었던 신석기 혁명이 아니라, 바로 정치혁명, 신비하고 돌이킬 수 없으며 원시사회의 종말을 가져온 이러한 정치혁명의 출현이다. 우리는 그것을 국가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다. 그래도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라는 맑스주의 개념을 옹호하고 싶다면 아마도 하부구조는 정치의 영역이고 상부구조는 경제의 영역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럽 사람들이 처음 조우했을 당시의 투피-과라니족이 보통의 원시 세계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는 것은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이 차이는 본질적인 두 가지 점으로부터 생겼다. 즉 그 부족이나 지역 집단의 인구밀도가 이웃 집단에 비해 명백히 높았다는 점과 그들의 지역 집단의 규모가 열대 우림 지역의 보통 사회-정치 단위보다 훨씬 컸다는 점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주민이 수천에 달하는 투피남바족의 여러 마을을 도시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웃한 사회의 '표준적인' 인구 규모보다는 훨씬 큰 것이었다. 이러한 인구 증대와 집중―이것 자체가 아메리카의여러 제국을 제외한 아메리카의 원시 사회에서는 매우 드문 현상이다―속에서, 그들의 추장제에서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경향이 명료하게 나타났다. 투피-과라니족의 추장은 분명히 전제군주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 권력 없는 추장은 아니었다. 투피-과라니족의 추장제의 장황하고 복잡한 분석을 여기에서 시도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는 단지 이를테면 사회의 한쪽 끝에서는 인구 증가가 그리고 다른 한 쪽 끝에서는 정치권력의 완만한 출현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원시 사회의 인구 팽창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는 것은 민족학의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인구 동태와 정치의 관련성에 대해 해명하고 전자가 사회학적 영역을 통해 후자에게 미치는 힘을 분석하는 것은민족학의 과제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말하기를 유일한 무기로 지닌 예언자들이 인디언들을 '동원할' 수 있었고, 다양한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종교적 이동에 참가시킴으로써 원시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실현할 수 있엇던 것이다. 그들은 추장의 '프로그램'을 일거에 실현할 수 있었다! 이것은 역사의 심오한 계략이었을까? 원시사회는 결국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을까? 그 누구도 이 질문에 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추장에 대한 예언자들의 반역적 행위는 기묘한 반전을 통하여 예언자들에게 추장이 지니고 있던 것보다 훨신 큰 권력을 부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폭력의 반대편에 말하기가 있다는 생각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원시 사회의 추장이 순수한 말하기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면, 또한 아마도 매우 특수한 조건하에서 원시사회는 또 다른 이야기, 즉 예언자들의 이야기에, 그것이 명령으로서 말해졌다는 것조차 잊은 채 귀를 기울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예언자들의 이야기 속에 아마도 권력의 이야기가 배태되어 있고, 사람들의 욕구를 대변하는 선도자의 고양된 모습 속에 전제군주의 모습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예언자의 말하기, 그 밀하기의 권력에는 권력 자체의 원천이, 그 이야기 속에 국가의 시초가 내재해 있는 것일까? 예언자들은 인간들의 주인이기 이전에먼저 영혼의 정복자였던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자들과 관련된 극단적인 경험(왜냐하면 그 이유가 인구 동태에 있든 다른 것에 있든지 간에 투피-과라니 사회는 원시사회가 원시사회로서 존재할 수 있는 최대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에도 불구하고 야만인들은 우리에게 추장이 추장답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지속적인 시도, 즉 통일화의 거부와 하나인 국가를 떨쳐버리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를 가진 사람들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적어도 그것과 똑같은 정도의 진리로서 역사 없는 사람들의 역사는 국가에 대항하여 싸우는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원시 사회가 정치나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주장이나 잉여 생산을 하지 못하는 생계 경제 체계였다는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니고, 사실은 '강제적' 정치 권력을 거부했으며 잉여 생산을 '방지'하거나 '소진'했다는 것이다. 이는 강제적 정치 권력, 즉 국가를 인간 문화에 반대되는 '자연'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원시 사회가 가지지 못했던 것은 '역사'와 '경제'일 뿐, 정치 권력이나 잉여생산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문제시되는 것은 어떻게 하여 강제적 정치권력이, 역사가 탄생하였는가이다. 클라스트르는 인구 규모의 증가와 상관이 있지 않을까 의견을 내놓지만, 인구 규모의 증가가 어떻게 해서 강제적 정치권력을 낳게 되는지(반국가적 투쟁을 무력화시키는지)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결국에 인간은 부정하고픈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생각해오는 것처럼, 인간이 차이로 말미암아 생존하기 때문일까? 소규모 공동체 안에서는 개개인의 특질이 선명히 드러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구분하고 인정해주는 데 무리를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 규모가 커지면 개개인의 특이성은 사회 안에 매몰되기가 쉽다. 바로 그 때문에 인정 투쟁이, 강제적 권력에 대한 희구가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