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컨대 '법'의 관념에 기초하는 인간적인 정의가 우주적인 규범들을 천상적이고 초월적인 모델로 삼고 있다는 사실(도, 아르타, 르타, 체덱, 테미스 등)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아난다 K. 쿠마라수아미의 연구가 훌륭하게 밝혀 놓았듯이 "인간의 예술품들은 신의 예술품에 대한 모방"이라는 사실은 고대 미학의 주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아득한 때에 신들이 행한 행위들의 반복을 통하여 인간의 영혼 속에 창조되는 다양한 열광의 상태는 말할 것도 없고(예컨대 디오니소스적인 오르지), 에우다이모니아, 즉 지복의 상태 자체가 신적인 상태의 모방이라는 사실이다. "신의 지복은 모든 것을 능가하고 신의 행위는 순수하게 관조적이며, 인간의 행위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행위는 신의 행위에 가장 근접하는 행위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또는 "가능한 한 신을 닮아야 한다." 또는 "완전한 인간은 신과 비슷하다."(『성 토마스 아퀴나스』)

<천지창조>를 반복하는 <신년>제 시나리오들이 역사적인 민족들, 즉 바빌로니아인, 이집트인, 히브리인, 이란인들처럼, 그들과 더불어 정확한 의미의 역사가 시작된 민족들에게서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자신들이 최초로 '역사'를 건설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면서, 그 민족들은 후대를 위해 자기들의 행동을 기록한 듯하다. 또한 그 민족들은 지나간 시간을 폐기하고 우주 창조를 재현함으로써 주기적인 재생을 이루어야 할 필요성을 보다 절실하게 느꼈던 듯하다.
'원시' 사회는 아직 원형들의 낙원에서 살고 있는 사회이다. 그 사회에서 시간은 생물학적으로만 기록될 뿐, '역사'로 변형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부식 작용이 사건들의 비가역성을 드러내보임으로써 인간의 의식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 원시사회들은 '악'의 축출과 죄의 고백을 통하여 주기적으로 갱신된다. 원시사회도 마찬가지로 주기적인 재생의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은 그 사회 역시 소위 '원형들의 낙원'에 끊임없이 머물 수는 없다는 것, 그 사회의 기억이 결국은 사건들의 비가역성을 알아내게 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역사'를 기록하기에 이른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따라서 원시민족들에게 있어서도 <우주> 속의 인간의 존재는 하나의 전락으로 간주된다.

'태음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죽음이나 인류의 주기적인 죽음은 필연적이다. 달이 '재탄생'하려면 사흘간의 어두운 밤이 있어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 인간과 인류의 갱신을 위해서는 죽음이 불가피하다. 어떠한 형태이든, 모든 형태는 형태로서 존재하고 또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힘을 잃고 쇠퇴한다.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아주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무형의 것과 다시 합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애초에 자신이 그곳으로부터 태어난 바 있는 원초적 통일성과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혼돈' 속으로(우주적인 차원), '오르지' 속으로(사회적인 차원), '어둠' 속으로(종자의 경우), '물' 속으로(인간의 경우에는 세례, 역사의 차원에서는 '아틀란티스' 등)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여서 간단히 몇 줄로 논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원시인들'의 향수는 '짐승 상태의 낙원'으로 복귀하려는 욕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고 믿을 만한 근거들이 꽤 있다. 우리가 아는 한, <낙원>에 대한 신화적인 기억들은 '전락한 인간'이라는 현실적 조건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영적 충만과 지복을 누리는 이상적인 인간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실제로 많은 민족들의 신화에는 인간이 노동이나 고통, 죽음을 알지 못했던 아득한 시절, 손만 뻗치면 얼마든지 먹을 것이 넘쳐나던 시절에 대한 암시가 나온다. 아득한 그때에는 신들이 <땅>에 내려와 인간들과 섞여 함께 살았고, 인간들도 쉽사리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의례상의 어떤 과오 때문에 땅과 하늘 사이의 소통이 끊어졌고, 신들은 가장 높은 하늘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 이후로 인간들은 먹기 위해 일을 해야 했고, 더 이상 불멸의 존재도 아니게 되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사회의 인간이 경험하는 욕구, 즉 '역사'를 거부하려는, 원형들을 무한히 모방하려는 집요한 욕구는, 세속적인 삶의 하찮음에 매몰되어 '영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의 표현, 실재에 대한 갈증의 표현이다. '원시인'들이 실재를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표현과 이미지들이 우리에게는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일지라도,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원시적인 행태가 갖는 깊은 의미이다. 그 행태를 지배하는 것은 '비실재'들로 이루어진 세속 세계와 대립하는 절대적 실재에 대한 믿음이다. 궁극적으로, 세속 세계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가 아니다. 세속 세계는 대표적인 '비실재', 비창조물, 비존재이고, 요컨대 무無이다.

...어쨌든 신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모든 역사적 사건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유대 민족의 신은 원형적인 행위들을 창조한 동방의 신과는 달리, 끊임없이 역사에 개입하고 사건들(침략, 포위 공격, 전투 등)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인격이다. 그렇게 해서 역사적인 사건들은 신을 마주한 인간의 '상황들'이 되고, 또한 바로 그런 점에서 그때까지 그 어떤 것도 부여해줄 수 없었던 종교적인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의 현현이라는 역사의 의미를 히브리인들이 최초로 발견했다는 것, 그리고 짐작할 수 있는 바대로, 그 관념이 기독교에 의해 계승·확장되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유대 엘리트 집단에 의한 역사의 수용과 역사에 대한 가치 부여가 앞 장에서 우리가 검토한 바 있는 전통적인 태도의 시효 상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계의 궁극적인 재생에 대한 메시아적인 믿음도 일종의 반역사적인 태도이다. 더 이상 역사를 부정하거나 주기적으로 폐기시킬 수 없게 되자, 히브리인들은 상당히 먼 미래의 어느 때가 되면 역사가 결정적으로 끝나리라는 희망 속에서 역사를 견뎌낸다. 시간 속에 역사의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역사적인 사건들과 시간의 비가역성을 상쇄하는 것이다. 메시아 사상의 정신적 지평 안에서 역사에 대한 저항은 원형들과 반복의 전통적 지평 안에서보다 훨씬 단호하게 나타난다. 전통적인 지평 안에서는 <창조>의 주기적인 반복과 시간의 주기적인 갱신에 의해 역사를 거부·부정·폐기했다면, 메시아적인 관념 속에서는 역사를 그 역사를 종말론적인 기능 때문에 감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어쨌든 역사를 감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언젠가는 그것이 끝나리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제 역사는 영원한 현재를 살고 있다는 의식(원형들이 계시되었던 비시간적인 순간과의 일치)을 통해 폐기되는 것도 아니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제의(예를 들면 신년제)에 의해 폐기되는 것도 아니다. 역사는 미래 속에서 폐기된다. <창조>의 주기적인 재생이 미래의 그때에 일어날 단 한 번의 재생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에 결정적으로 종지부를 찍으려는 의지도 전통적인 관념들처럼 반역사적인 태도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한참 전에 읽었던 것이라 좀 가물가물하다.
인간은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인식한다. 여기에서 모든 고통과 슬픔, 허무가 발생한다. 한 세대가 죽고 다음 세대가 뒤를 잇는다는 것, 그렇게 죽음의 흔적이 쌓여 가는 것, 자신이 그 전이나 후의 인간과 다르다는 인식같은 것들이 역사의 탄생을 종용하게 된다. 역사는 그렇게 고통스럽고 폭압스러운 것이다.
엘리아데는 그래서 원시 사회는 세계를 원형의 반복으로 바라보며 역사를 축출하게 되고, 그 노력이 한계에 다다른 역사 사회에 이르면 영원회귀적인 시간의 주기적 갱신을 도입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유대교는 최초로 역사를 원형의 반복이 아닌, 원형의 새로운 생성의 차원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이것이 기독교로 이어지면서 '현대적인', 즉 역사적 인간의 종교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역사에 신의 의지(초역사적 의미 부여)가 가해진다고 해서 인간이 역사의 폭압을 완전히 감내할 수는 없는데, 바로 그것을 메시아 사상이 가능케 한다. 원시 사회에서처럼 우리가 신적이거나 성스러운 행위들을 반복하지 않아도, 초기 역사적 사회에서처럼 시간의 주기적 갱신을 거치지 않아도, 메시아 사상은 역사를 향유하면서 삶의 고통과 허무를 부정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역사라는 고통은 이렇게 두 가지 방식으로 감내되어진다. 첫 번째가 역사에 대한 부정과 영원회귀적 갱신, 두 번째가 (메시아 사상을 포함한) 역사에 대한 초역사적 의미 부여인 것이다. 엘리아데는 양자간의 가치 판단을 유보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역사주의는 그것대로, 반역사주의는 그것대로 장단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도 지적하듯이 헤겔과 마르크스, 기독교는 역사주의적 관점을 견지한다. 그들에게 역사는 감내되어야 할 것이고, 그 끝에는 절대정신과 유토피아, 메시아적 종말이 자리하게 된다. 그 반대편에서 언급되는 것이 20세기 이후에 다시 주목받게 된 순환론들인데 동양적 우주관이나 니체, 토인비 같은 것들이다. 책이 1949년에 쓰여진 것을 감안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도 반역사주의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을 듯하다.
다만 나는 원시 시대나 초기 역사 사회의 반역사주의가 니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그것과는 좀 구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자가 역사에 대한 공포와 그에 따른 폐기에 기초하고 있다면, 후자는 일의적인 역사로부터의 탈출에 기초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보다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역사에 대한 투쟁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역사의 폭압을 극복하기 위한 열쇠는 바로 역사를, 죽음을, 일의성에 대한 포기를, 신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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