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이러한 합리성의 형식들이 인간 실천과 인간 역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물들은 만들어져 온 것들이기 때문에, 어떻게 그것들이 만들어졌는지를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그것들은 애초에 만들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비판 이론>

(요하나 옥살라) 구체적인 신체적 조작과 과학적인 객관화의 과정들은 서로가 서로를 보강한다. 몸의 정복은 이론적인 객관화를 가능하게 하였고, 범죄학과 범죄 심리 치료와 같은 과학들의 탄생을 초래했다. 반면에, 동반하는 과학들의 발전은 훈육적 기술들의 발전과 합리화에 도움을 주었다. 더 나아가 두 차원은 정상화 과정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연계되었다. 과학적 담론은 규범으로서 기능하는 진리를 생산한다. 그러한 진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정상적인 체중이며, 정상적인 혈압이며 또 특정 성별과 나이에 해당하는 집단에 적절한 성적 파트너의 정상적 수인가를 이야기해준다. 주관화는 이러한 규범들을 내재화화는 과정을 통하여 작용한다. 우리는 정상적인 것에 가까워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중에 우리 자신의 행태를 수정하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특정 종류에 해당하는 주체가 된다. 규범 또한 개인적인 특성을 공통된 측정에 맞게 축소함으로써 객관화를 한층 더 진행시킨다. 우리 모두가 그래프 곡선 위에 있는 점들로 축소될 수 있다.

(미셸 푸코)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행태를 지휘하고, 결정하려고 노력하는 데 쓰이는 수단으로 힘 관계들이 이해된다면, 힘 관계들을 갖지 않는 사회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문제는 힘 관계들을 해체하여 완벽하게 투명한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유토피아로 보내려고 노력하는 일이 아니라, 지배를 최소화하면서 이러한 힘의 유희도 받아들일 수 있게 할 요소들이 되는 법의 지배, 관리 기술 그리고 윤리, 도덕적 기품, 자아의 실천 등을 인간의 자아에 부여하는 일이다. <자유의 실천으로서 자기 배려의 윤리>

(미셸 푸코) 내가 의미하고자 한 것은 다음과 같다. 통치 방법과 통치 방법 찾기에 크게 몰입하게 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항구적으로 제기되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저런 원칙들을 따르지 않고, 저러한 목적에 맞추지 않고, 저러한 절차들을 거치지 않으면서, 저렇게 통치받지 않을 수 있게 되나'의 문제. 그리고 이러한 사회와 개인 모두를 통치화의 대상으로 편입시키는 움직임에 대응된다고 생각되는 역사적 차원과 깊이를 부여한다면, 그 안에 대체로 우리가 비판적 태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통치술에 맞서는 반대편으로서, 혹은 상대방이자 동시에 적대자로서 통치술을 불신하고 거부하고 제한하며, 그 정당한 한도를 모색하고, 그것을 변형시키며, 그것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방식, 통치술과 동일한 발전 선상에서 조용하게 당시 유럽에서 탄생했던 일종의 문화적인 형식, 도덕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태도, 사고방식과 같은 그 무엇을, 나는 통치받지 않게 되는 기술 혹은 좀 낫게 표현하자면 저런 식으로는 그리고 저러한 대가를 치르면서는 통치받지 않겠다는 기술로 간단히 부르겠다. 따라서 나는, 비판의 그 으뜸되는 정의로서, 다음과 같은 비판의 일반적인 특징을 제시하려 한다. 즉 그런 식으로는 통치받지 않으려는 기술을 제시하고자 한다. <비판이란 무엇인가?>

(미셸 푸코) 결국 인식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결과가 아니라 그럭저럭 그리고 가능한 한 지식의 약간 정도만을 얻는 데 그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지식을 향한 열정이 지닌 가치란 무엇이겠는가? 사람이 찾고자 하고 성찰하고자 한다면, 사람들이 지금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의 여부와,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른 것을 지각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알려고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순간들이 삶 속에 있게 된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러한 자기 자신과의 놀이가 차라리 무대 뒤편에 있는 것이 낫다고 말하거나 그것은 기껏해야 목적 달성에 기여하고 나면 잊히게 될 예비적 실천들의 일부를 형성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사유를 사유 자체에 집중시키는 비판적 작업을 철학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도대체오늘날 무엇이 철학이 되겠는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대신에 어떻게, 어느 범위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를 알려고 하는 노력에서가 아니라면 그 어느 곳에 철학이 있을 수 있겠는가? 철학적 담론이, 밖으로부터, 타인들에게 지시하고, 진리가 있는 곳과 그것을 찾는 법을 말해줄 때, 혹은 순진하게도 확실한 말을 써서 그들에게 나쁘게 작용하는 사례들을 키우려 할 때에 그런 담론들에는 언제나 가소로운 무엇인가가 있다. 그러나 철학은 그 자체의 생각 속에서 그것에는 외래적인 지식의 실천들을 통하여 변할 수 있을지 모를 것들을 탐구할 자격을 갖는다. '평론'―의사소통의 목적을 위해 타인들을 단순히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 놀이에서 사람들을 변하게 만드는 분석 또는 실험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은 철학의 살아 있는 실체다. <성의 역사: 쾌락의 활용>

(요하나 옥살라) 그의 말기 사상에서, 푸코의 철학을 특징짓는 자유의 추구는 정상화하려는 힘에 대한 저항으로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삶의 방식을 개발하고 권장하려 한 노력으로 나타났다. 그것의 목적은 자기도취에 이바지하는 자기-양식화가 아니라, 다양성과 독창성의 확산이었다. 푸코 사상이 남긴 중요한 유산은 우리는 누구인가 혹은 무엇―공정한 시민들, 아름답고 덕 있는 시민들, 성적으로 건강하고 해방된 시민들―이 되어야만 하는가를 말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둘도 없는 삶의 방식을 가능하게 해줄 자유의 공간을 활짝 여는 데 있다.
그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급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주변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약간 다른 인물들―생각하고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현재로서는 여전히 상상할 수 없는, 방식들을 찾는 주체들―이 되었다.

(미셸 푸코) 기원은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기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알게 되면 그 기원은 해체될 수 있다. <어느 대담>

(옮긴이 홍은영) 주체에 대한 푸코의 계보학적 분석은 지고불변의 '인간형'이나 '참된 진리'를 찾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구성된 산물이 어떤 우연적 계기와 사건 및 차이의 놀이를  통해서 작동하는가를 탐색하는 것이고 이때의 주체가 어떤 권력 장치와 관계 맺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니 자, 이제 어떻게 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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