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남근적인 이야기에 반대되는 성의 이야기이다. 전자의 경우 여자는 제거에 의해 남자로부터 기인하는 데 반하여, 후자의 경우 남자는 예외적으로 여자로부터 기인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베텔하임의 분석이 『상징적 상처』에서 쉽게 강조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요컨대 남자들은 여자의 타고난 우월한 권력을 전적으로 거부하기 위해서만 그들의 권력과 제도를 확립한다는 것이다. 동인이 되는 것은 남근에의 선망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여자의 수태 능력에 대한 남자의 질투이다. 여자의 이 특권은 속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다른 질서, 즉 남성의 질서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는 여자의 본래의 특권은 격화될 수 있다. 사실 의례적인 질서 속에서 반대되는 성의 기호들을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하는 행위들은 대체로 남성의 행위들이다. 예를 들면 제물바치기, 절단, 인위적인 질 절개, 의만 등이 있다.

...이러한 모호함은 또한 남성과 남성의 쇠약함 속에서도 발견된다. '해방된' 여성적 주체에 의해 남자에게 야기된 공포도 그렇지만, '소외된' 여성의,즉 객체로서의 여성의 외설적인 크게 벌어져 있음 앞에 놓여 있는 남성의 약함도 상당하다. 여자가 '자신의 욕망의 합리성에 대한 자각에 의해' 즐기기를 요구하든, 완전한 매음의 상태에서 쾌락에 몸을 내맡기든, 다시 말해서 여성이 주체이든 객체이든, 해방되었든 매음당했든, 어디에서나 여성은 섹스를 급히 요구하는 존재, 크게 벌어져 있는 탐욕스런 존재,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존재가 되겠다고 자청한다. 모든 포르노가 여성의 성기 주위에서 촬영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발기가 되는것이 확실치 않음에도 불구하고(포르노에서는 성적 불능의 장면들이 없다. 즉 성적 불능은 멈출 줄 모르는 여성의 몸바침이 불러일으키는 환각에 의해 모조리 쫓겨나게 된다). 의심스러워진 성욕에 의해―성욕은 끊임없이 자신의 증거를 보여주고 나타나도록 독촉받기 때문에―표지가 있는 남성의 입장은 무너지기 쉽다. 그러나 여성의 성은 그 자신에게는 아무래도 좋다. 여성의 성은 자신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음과 크게 벌어져 있는 상태 속에, 그리고 자신의 영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성욕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는 남성과는 대조적으로, 여성의 이러한 지속성은 쾌락의 유기적인 표현의 차원에서, 우리의 환상의 차원이 된 무한한 섹스의 차원에서, 여성에게 결정적인 우월성을 보장해주는 데 충분한 것이다.

성이 기능과 자율적인 심급임을 자처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성은 유혹을 제거해버렸다. 오늘날에는 더욱, 성은 대부분이 경우 부재하는 유혹을 대신해서만, 혹은 실패한 유혹의 잔재와 상연으로서만 나타난다. 그리하여 욕망이라는 형태의 성적인 환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유혹이 부재하는 형태이다. 이처럼 유혹의 과정이 제거되는 가운데 욕망의 근대적 이론은 그 효력을 지니게 된다.
유혹적인 형태 대신에 이제부터 현존하는 것은 생산적인 형태의 과정, 성의 '경제학'의 과정이다. 예를 들면 욕구의 회상, 저장된 성적인 에너지에 대한 환각, 욕망의 억압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무의식의 환각이 현존한다. 이 모든 것과, 정신적인 것 일반은 자율화된 성적인 형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치 예전에 본능과 경제가 생산의 자율화된 형태의 침전물이었던 것처럼. 둘 다 이상화되고 있는 본능과 욕망은 해방(예전에는 생산력의 해방이고, 오늘날은 육체와 성의 해방이다)의 점진적인 도식 속에서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유혹의 순환 과정에는 멈춤이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유혹하기 위해 진실로 유혹할 수 있다. 게다가 즐기기 위해 다른 사람을 유혹할 수도 있다. 한 사람에게더 다른 사람에게로 나아가는 속임수는 교묘한 것이다. 이 매혹적인 속임수는 유혹하는 것일까? 아니면 유혹당하는 것일까? 그러나 유혹당하는 것은 여전히 유혹하는 최상의 방법이다. 그것은 끝없는 노래의 절이다. 유혹에는 적극적인 것이나 수동적인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체나 대상도 없고, 내적인 것이나 외적인 것도 없다. 유혹은 두 가지 면에서 작용하고, 어떠한 한계도 그들을 갈라놓지 못한다. 아무도 유혹당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다른 사람을 유혹하지 못할 것이다.

유혹은 직접적으로 가역적인 것이고, 그리하여 유혹의 가역성은 유혹이 내포하는 도전과, 유혹이 빠져드는 비밀로 이루어진다.
유혹하고 기분전환시키는 힘, 흡수하고 매혹하는 힘, 총체적으로 섹스뿐만 아니라 실재까지도 무너뜨리는 힘, 도전의 힘. 섹스와 말의 경제적 사용이 아니라 은총과 폭력의 한술 더 뜨기, 즉 섹스가 벌어질 수 있는 즉각적인 열정(이 열정은 그 자체 안에서, 도전과 죽음의 과정 안에서, 그리고 그것이 충동과 구별되는 근본적인 비정의 안에서 고갈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의 대상에 관해서는 막연하지만, 힘으로서 그리고 기원으로서 정의된다. 반면에 유혹의 열정은 실체도 기원도 없다)이 있다. 그것은 리비도적인 집중, 그리고 어떤 욕망의 에너지로서가 아니라 놀이의 순수한 형태와 순전히 형식적인 한술 더 뜨기로 자신의 강렬함을 지닌다.



첨엔 흥미롭고 명쾌하게 읽혔는데 뒤로 갈수록 뭔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이건 뭐 다시 읽는다고 나아질 것 같지도 않고;;
대충.. 여성이 남성에 의해 억압되어 왔다는, 남성의 자리에도 여성이 앉아야 하고 혹은 그것을 탈취해야 한다는, 남성의 언어로 여성을 재정의하려는 기존의 페미니즘에 반대하여 여성의 힘은 그 이면, 외부, 빈 공간에 있었고, 그것의 핵심이 바로 '유혹'이라는 주장. 섹스와 생산과 노동, 남성적인 것들은 축적하고 승리하려 하지만 유혹과 여성성은 가역적이고 와해시키고 죽인다. 그래서 결국은 유혹을 이길 수 없다.
'생산'에 반대해 '에로티즘', '생산을 전제하지 않은 순수한 낭비'같은 것을 주장하는 조르주 바타이유하고 좀 비슷한 듯.
매력적인 이야기인데 뒤로 갈수록 꼬이고 단어나 문장도 불명확해지고 그래서 난감하다.
책 마무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호하고 찝찝한데..-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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