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공상과학소설에서는 1968년 혁명이 성공하면서, 계급, 인종, 성 취향 등의 차별이 철폐되고 유일하게 외모와 성적 매력이 새로운 차별의 근거가 되는 사회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외모차별이라는 지구상의 마지막 차별과 전투를 벌인다. 그래서 급기야 이 외모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남과 여의 대표를 뽑아 복제인간을 대량생산하는 데 이른다.

자신의 사생활이 강제로 밝혀지고 폭로되어 상처받기 두려운 동성애자들은 사회 곳곳에 살고 있는 나의 형제, 친구, 형, 누나들이다. 나는 동성애가 나 외부에 있는 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꽃들은 양성성을 가지고 있어서 남성성이 강하면 수술이 되고, 여성성이 강하면 암술이 된다고 한다. 생물학적 성인 섹스의 의미보다 사실 젠더라는 사회적 성이 중요하다. 사회적 성은 유동적이며 양성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같은 여성, 여성같은 남성이 있듯이 말이다. 더 나아가 나는 동성 간의 인간적인 교류가 성애로 발전하는 것이 양성성을 다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성은  n개로 다양하다. 트랜스젠더, 게이, 레즈비언, 가학-피학, 도착 등 다양한 성 정체성이 가능한 것이다. 하나의 성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욕망의 흐름을 가두어 놓는 억압적인 울타리라고 생각한다. PC통신 시절 때 야오이(동성애)소설이 참 유행이었던 것 같다. 야오이물을 읽다보면 변용될 수 있는 성에 대한 상상력이 참 다양하고 인간적이라는 것을 느낀다. 야오이 소설에 감명받아 나는 친구와 키스를 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환상은 환상이었을 뿐 징그러워서 침을 뱉어 버렸다. 나에게 동성애는 아직 개발이 안 된 처녀지의 영역이었나 보다. 그런 실패 이후로도 나는 나 자신을 이성애자라고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성에 대한 감정이 더 우월할 뿐 여전히 동성에 대한 영역도 계발시킬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동성애를타자로서 바라보지 않으며 나의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존재로서 바라본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방송출연이 금지되었던 홍석천 씨의 사건을 보면서 나는 미시파시스트들이 권력과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를 했다. 그러나 그들도 천개의 다양한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 것임에 분명하다. 소수자들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모든 사회시스템과 분자들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당신도 소수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권력과 미디어를 장악한 사람들은 부유하고, 건강하며, 젊고, 다수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들도 늙고, 병들고, 약한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안다면 늘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성적 소수자의 입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수자들, 즉 여성,장애인, 노인, 어린이,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정상인이라는 주류 다수자의 앙상한 논리밖에는 없다. 그것은 동정 정도의 값싼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이동시켜 그들 입장이 되는 것이 요구된다.


인라인을 타본 사람은 모두 다 알겠지만 그것의 느낌은 목적을 가지고 장소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와 장소 사이의 횡단면을 따라 미끄러지듯 속도감 있게 유동하는 어떤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횡단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것은 속도감 있게 거리를 주파한다. 발에 바퀴를 단다는 간단한 기계장치는 횡단의 욕망을 현실감 있게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물론 자동차에도 바퀴가 달려 있다. 그러나 자동차-인간 사이의 환경과 인라인-인간 사이의 환경은 다르다. 인라인은 바퀴인간으로 인간의 몸을 직접적으로 변형시키며 도로의 접촉면을 매끄럽게 횡단한다. 바퀴는 몸의 일부가 되며 매끄러운 대지는 반드시 필요한 접촉면이 된다. 인라인을 타는 사람들은 지상의 모든 영토를 횡단하는 매끄러운 접촉면을 꿈꾸며 욕망한다. 욕망은 모든대지를 매끄럽게 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했을 때야 비로소 욕망이 노마드적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가 하루에 잠을 한 시간 안자는 것으로 계산해 보니 인생에서 어마어마한 시간을 더 사는 것이라는 것을 계산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학자는 하루에 한 시간을 덜 자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생활리듬이 엉망이 되어서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들뢰즈 식의 대한민국 욕망 해설서.

외모와 성적매력의 차별을 주제로 한 공상과학소설은 우엘벡의 '소립자' 이야기하는 걸까?

나도 동성애의 추억을 갖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때였을 거다.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친했다. 흔히 말하는 베프. 4학년 때 쯤에는 둘이서 함께 성의 신비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날로부터 라캉의 실재계같은 날것의 생생한 세계를 서로 힘겹게 받아들여 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학교 1학년이 되었는데, 당시에 우리는 각각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었다. 물론 내가 좋아하던 여자애를 앞에서 보면 가슴이 미친듯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고 그러긴 했지만 그걸 사랑이라고 하기엔 뭔가가 부족했다. 그런데 그 부족한 무언가가 그 친구에게서 채워지는 느낌이, 정말 어느날 갑자기 들었다. 학교가 시골에 있었는데, 같이 쓰레기장 청소를 하고 선생님한테 검사를 맡고 나와 시골길을 걸었다. 추수가 끝난 들녘엔 짚단 뭉치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우리는 거기에 같이 누워서 하늘을 유유히 유영하는 매를 보았다. 가슴이 한없이 충만해졌고, 나는 그 때 어설프게나마 이 감정이 우정의 단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느꼈었다. 2학년이 되어 전학하기 전까지 나는 정말로 행복했던 것 같다. 당시에 여자애를 좋아하던 것이 사랑이 아니었던 것만큼이나 그 친구를 좋아하던 것도 사랑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1의 나에게 그 두 감정은 모두 사랑으로 발전될 여지를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좀 부끄러운 경험이 있다. 난 야간자율학습이 너무너무너무 싫었다. 고3 되면 할 작정으로 고2 때까지는 공부도 거의 안했었던 터라 야자는 그저 잉여 시간일 뿐이었다. 난 책 읽고 글 쓰고 그러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책 읽는다고 교무실에 불려 가기도 했었다. 어이가 없어서;; 어쨌든 어느 야자 시간, 너무너무 심심해서 짝이었던 기동이와 내기를 했다. 뭔가 정말 재밌는 일을 꾸며 보자고. 근데 내가 한 건 기억나는데 기동이 것은 기억이 안나네.. 나는 어떤 반 아이한테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다. 근데 내가 연기를 너무 잘해버려서 상황이 꽤나 심각해진 것이다. 쪽지(당시엔 핸드폰이 거의 보급되지 않았었다)로 노골적인 성묘사도 하고 그랬는데 얘가 너무 충격을 먹어서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가 한계를 넘어서자 자기 혼자 감당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선생님한테 상담을 받으러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교실문을 나서는 그 아이를 가로막고 거짓말임을 고백했고, 맞아 죽을까봐 며칠을 도망다녔던 것 같다. 내기는 내가 당연히 이겼고.
다시 들뢰즈/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 어느 페이지를 보자.

남성은 수컷의 부분이 우세한 인간일 따름이요, 여성은 암컷의 부분이 우세한 인간일 따름이다... ...한 남성의 수컷의 부분은 한 여성의 암컷의 부분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지만, 또한 한 여성의 수컷의 부분과도, 혹은 다른 한 남성의 암컷의 부분과도, 또 혹은 다른 남성의 수컷의 부분과도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통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는 이성애적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알게 모르게 동성애적이요, 요소적 분자적으로는 결국 횡단성애적이다. 

신승철은 자동차와 인라인을 비교하면서 인라인은 인간을 '바퀴인간'으로 직접적으로 변환시킨다고 말하는데, 다비드 르 브르통의 '근대성과 육체의 정치학'을 보면 자동차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이 된다. 현대인에게 있어 자동차는 석기시대의 돌도끼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로 포섭되었다는 것이다. 그 책은 사이보그 인간에까지 나아가지만.. 나는 주행 도중에 빨간 불을 보면 원시인이 맹수와 마주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반사적으로 브레이크에 발이 가고, 주차를 할 때는 고양이가 자신의 수염을 이용해 자신의 몸이 통과할 수 있는 구멍인지를 인식하듯 차체가 자신의 몸이 된 것처럼 공간감을 느낀다. 자동차가 도시에서 차도로만 다닐 수 있듯 인라인도 편평한 길만을 갈 수 있다. 나는 자동차를 통해서도 노마드적인 욕망을 느끼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이다. 저자는 책에 소개된 여러 사회현상에 대해서 대부분 유보적이거나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결국엔 멈춰서는 지점이 있다. 그래서 그게 못내 아쉽다. 끝까지 달렸으면 좋겠다. 자동차에 인라인도, 등산화도, 고무보트도, 행글라이더도 싣고 말이다.

마지막 잠 이야기는 익숙한데도 읽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져서 옮겨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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