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와 상징계의 관계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만약 상징계가 실재에 대한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재현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실재를 직접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주체들은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만약 모든 것이 정확히 이해된 그대로라면, 모든 것이 자체의 충만함 속에서 온전히 파악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이 세계를 보는 방식과 내가 보는 방식 사이에 어떤 불일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기표가 완벽하게 모든 기의와 부합된다면, 모든 기호가 모든 지시대상과 일치한다면, 결코 의미화 연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오늘날 무수한 탈중심화된 인격을 지닌 주체들에게 동일성을 부여해주는 것이 '대타자'라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내 인격의 서로 다른 측면들은 상징적 질서 속에서 동등한 지위를 갖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나 자신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상징적 효력을 공표하는 대타자에 의해 등록된 자기 혹은 자기들뿐이다. 지젝이 말하듯, 이것이 발생하는 차원은 현실의 차원이 아니다.
...또한 이 예는 초자아의 '즐겨라!'는 명령이 어떻게 그 명령 자체의 효과를 무효화시키는지, 즉 그 명령의 수신인으로 하여금 향락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게끔 혹은 향락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지젝은 오늘날 사람들이 성행위에 대해 점점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한다.
이런 경향은 비아그라의 인기에서도 나타난다. 이를 두고 지젝은 초자아가 화공학적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발기부전 남성들의 발기 기능을 회복시켜 주는 비아그라는 그런 남자들의 (아마 애초에는 초자아적 명령 때문에 생겼을) 심리적인 문제들을 우회하여 그들이 원할 때 언제든지 발기가 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하여 이 약물이 의미하는 바는 "너는 섹스를 즐겨야 한다. 너에게는 이제 더 이상 섹스를 하지 않을 변명거리가 없다. 만약 그래도 섹스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의 결함이다!"라는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냉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지배된 세계를 살고 있다. 마르크스와 슬로터다익의 공식화에 따라, 지젝은 냉소주의적 태도를 "그들은 자신의 행위 속에서 자신이 환영을 따르고 있음을 잘 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렇게 한다."로 요약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것 속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알튀세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같은 '믿음기계'에 대한 믿음을 자각하기도 전에 이미 작동한다.
...이 문제를 보는 또 다른 방법은, 어떤 것의 총체는 잉여에 의한 불균형이 초래됨으로써만 실현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의 저서에 붙은 '그리고'라는 단어를 지젝이 빈번하게 논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의 제목이나 진술에 쓰인 '그리고'라는 단어는 전체에 속한 원소 하나가 나머지 전부의 토대를 형성하는 관계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가 '자유, 평등, 사유재산의 배타적 영역과 벤담'을 논할 때 마지막 항(벤담)은 다른 항들이 읽히는 의미 지평이다. 지젝의 주장처럼, "이 보충적인 '벤담'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감상적인 문장에 구체적인 내용을 제공하는 사회적 환경-상품 교환, 시장 거래, 공리주의적 이기심-을 대표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진술에서 '벤담'은 나머지 단어들을 문장 속에 고정시키는 소파 고정점으로 기능한다.
인종주의와 관련하여 환상의 상호주관성이 의미하는 바는, 역설적으로 인종주의자는 그들에게 희생되는 자의 욕망을 상연한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욕망의 심연에 직면하여 인종주의자들은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환상을 구성함으로써 이 심연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유대인 거주지를 없애고자 하는 인종주의자의 욕망은 실제로는 유대인의 욕망이 야기한 불안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 모든 점들이 '인종주의적 환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지젝은 인종주의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인종주의적 환상이 존재한다고 한다. 첫째 유형의 환상은 인종적 '타자'가 우리의 향락을 욕망한다고 걱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향락을 훔치려고 하며, 우리만의 고유한 환상을 강탈하려고 한다. 둘째 유형의 환상은 인종적 '타자'가 어떤 낯선 향락에 도달했다는 불쾌감에서 비롯된다. '그들'이 즐기는 방식은 너무나 이질적이고 낯설다. 이 두 환상들이 공통적으로 기대고 있는 것은 '타자'가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즐긴다는 것이다.
지젝이 주장하듯, 우리는 환상을 통과하는 방법을 배울 때 인종주의적 환상 형상에 부여된 특질들이 실은 우리 자신의 체계가 만들어낸 것에 다름'아님'을 깨닫게 된다. 즉, '그들만 사라지면 삶은 더 완전하고 사회는 다시 조화로워질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 '그들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간에 사회는 언제나 이미 분열되어 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환상을 통과해야만, 인종주의적 형상이 완전한 사회 구성의 실패를 체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지젝은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사이의 방법론적 유사성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 지젝이 주장하듯이, 두 분야의 토대는 물질적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이론을 공식화하려는 데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를 개선시키고자 하며, 정신분석학은 환자의 상태를 개선시키고자 한다. 달리 말해, 두 분야는 물리학이 대상을 취급하는 방법으로 자기 대상(사회와 무의식)을 연구하는 이론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은 자기 대상을 변형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두 분야의 근저에는 실천적 의지가 있다. 지젝은 다른 어떤 이론가들보다 정치적 라캉을 발굴하여 자신의 사고를 혁명적 정치학에 결합시키고자 노력한다.
(숀 호머) 인종주의,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의 감춰진면을 폭로할 때, 지젝의 작업은 전반적으로 이데올로기 비판의 패러다임 안에머물러 있다. 그의 작업은 결코 두 번째 계기, 즉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이데올로기 중 어떤 것이 대항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정치 고유의 공간을 열어 놓을지 성찰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다. 나는 항상 지젝이 실제로 무엇을 주장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하겠다.
예전에 지젝이 쓴 '하우 투 리드 라캉'을 읽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건 '하우 투 리드 지젝'이었던 것 같다.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숀 호머의 '라캉 읽기'가 도움을 줬었는데 책 말미에 숀 호머의 발언이 나와서 반가웠다. 이런 저런 책을 먼저 읽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하우 투 리드 지젝' 격인 이 책은 정말 이해하기 쉬웠다. 지젝 책을 막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달까.. 아니란 거 안다;;
읽으면서 계속 '이건 데리다스러운데...'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그 접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지젝도 데리다와의 화해를 암시하기도 한단다. 지젝은 뭐랄까.. 추리 소설의 느낌? 그래서 계속 보다 보면 뻔해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