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내가 그저 반복하기만 한다면, '따르기'를 단순한 반복으로 해석한다면, 즉 생기를 불어넣는 일이 아니라 어떤 기게적인 방식으로 반복하는 일로 해석한다면 이는 또 다른 형태의 배반이 되겠지요. 그래서 따르기를 원한다면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프랑스어로 에쿠테, 귀 기울이면서 동시에 듣고, 이해하며,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하며, 복종해야 합니다. 프로이트나 하이데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자 할 때 그들이 말하고 쓰는 것을 듣기 위해 내가 뭔가를 말해야 하는,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차례가 되어 뭔가를 써야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쓰게 되면 뭔가 다른 것을 말하게 되고, 뭔가 새로운 것, 뭔가 다른 것이 존재하게 되며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충절입니다. 이것이 이론과 철학과 문학의 충절이고, 예컨대 결혼 같은 일상 생활에서의 충절이기도 합니다. 동일한 것을 그대로 반복할 수는 없고 발명해야만 합니다.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하려면 뭔가 다른 것을 행해야만 합니다.


(데리다) 아무런 법칙이 없기 때문에 윤리학이 존재합니다. 내가 규칙을 발명해야 하기 때문에 윤리학이 있는 것이죠. 내가 규칙을 안다면, 어떻게 읽는지 안다면, "자 단순하게 읽어야 해요. 규범이 있고 규칙이 있으니 의무를 다하기만 하면 됩니다."와 같이 명령이 단순하다면, 책임질 일도 없겠죠. 서로 다르며 양립할 수 없는 두 명령에 응답해야 하는 이런 아포리아적 구조들이 존재한다는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책임이 시작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면 규칙을 적용하면 되고 학생들에게는 규칙을 적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윤리적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비윤리적이라고 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지식과 행동 사이에 괴리가 있을 때 윤리는 시작되고,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규칙을 고안하는 일에 우리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텍스트에 반응하는, 그 텍스트에 연기 서명하는 또 다른 규칙을 만들어 내는 식으로 텍스트를 읽어낼 때 규칙을 발명하게 됩니다. 이는 무척 위험하고 아무런 보장도 없습니다. 보장된 윤리는 윤리가 아닙니다. 보험에 들어 있는 윤리라면, 그리고 잘못했을 때 보험이 댓가를 지불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건 윤리가 아닙니다. 윤리는 위험한 것입니다.


(데리다) 니체는 능동적인 망각, 곧 망각하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우연히 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니체가 보기에 우리는 망각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적인 책임이란 멍청이가 되거나 필요에 못이겨 기억과 의무에 대해 "예"라고 답하는 일입니다. (멍청이)의 "네, 네"나 "예, 예"를 답습해서는 안 되고, 긍정의 "예, 예"를 반복하는 사람의 "예, 예"를 되풀이해야 합니다. 생성에 충실하며, 긍정을 즐겁고 기분 좋은 방식으로 반복하기 위해서는 회상하기를 멈추어야만 하며 기억과 책임의 굴레를 짊어지는 일을 그만두어야만 합니다. 삶은 망각입니다. 망각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능동적으로 망각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라면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망각하기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니체가 능동적 망각으로 뜻한 것은 망각해야만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계속 삶을 유지하면서 긍정하고 "예, 예"라고 말하라는 것이지요. 잠시 전에 결혼과 "네 그러겠습니다."라는 맹세, 혹은 프랑스식으로는 그냥 "예"라는 맹세에 관해 말한 것으로 돌아갑시다. 제가 "예"라고 말할 때, 결혼식에서 누군가에게 충실하겠다고 약속할 때, 그것은 당장 그 자리에서 "예'라고 약속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미 얼마 후에도, 한 시간 후에도, 내일도, 그리고 영원히 "예"라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네 그러겠습니다."라는 긍정의 구조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예"를 반복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간직해야만 하는 동시에 망각해야 합니다. 오늘의 "네 그러겠습니다."와 어제 혹은 50년 전의 "네 그러겠습니다."를 말하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하는 동시에 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새로운 "네 그러겠습니다."가 될 수가 없죠. 그 맹세가 새롭기 위해서는, 그것이 하나의 사태이자 혁신이 되려면 다소간의 망각이 작용해야만 합니다. 새로운 사태를 수행하고 경험하기 위해서 망각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망각하지 않음의 조건이지요. 그냥 기억하기만 한다면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제 생각엔 그 점이 바로 니체가 염두에 두었던 것, 즉 긍정을 반복하기 위해서는 망각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망각이 단순한 파괴도 아니며 사태를 대비하는, 다가올 것을 준비하는 윤리적 방식입니다. 니체에게 이것은 물론 비기독교적인 것이었지만 기독교적인 항목으로 사유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예, 예"를 기독교적이거나 유대교적인 메시아주의, 즉 사태에 대한 준비, 도래할 인물에 대한 준비로 변환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망각하지만 우리는 그냥 미래에 그가 도래할 때를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망각은 나쁜 것이 아니죠. 망각은 충절의 조건이죠.


(토릴 모이) 서구 사회에서 여성들은 20세기 초반에 추상적인 평등권을 획득했습니다. 선거권 등을 말입니다. 그리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제2의 여성 운동이 있었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여성이 모든 종류의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규칙과 법규들, 관습과 습관들을 철폐하고자 했습니다. 제2의 여성 운동은 추상적 권리를 구체적 권리로 바꾸고자 했던 거지요.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권리에 대한 논의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흐름의 여성 해방적 행동주의에서 얻은 것을 기반으로 한다고 가정하고 이제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의 구체적인 참여를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보편에의 접근권'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미국 여성들은 오래전부터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의회의 단지 14퍼센트만이 여성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가를 논의해야 합니다. 보수주의자들은 말하겠지요. "그것은 여성들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다. 여성들이 그저 정치에 관심없을 뿐이다."라고요. 저처럼 좌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전적으로 이데올로기나 사회적 관습 등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존 샤드) 새로운, 사후의 친구인 드망은 옛날의, 살아있는 친구 드망과 동일하지 않다. 사후의 친구는 죄의식에 찬 과거가 있고 따라서 살아 있는 동안에 데리다가 결코 알았던 적이 없는 어떤 인물이다. 이런 오고 감, 아니 가고 옴은 사실 '아나콜루톤적인 불연속성'에 대한 데리다의 부연 설명에 기입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기대했던 동반자가 결핍된 상태로 남지만, 또한 기대하지 못했던 동반자를 얻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강연에서 인용하자면,

나는 삶에서 변화를 예견할 수 없다. 나는 누가, 어떤 타자가 막간에 도착했는지 예견할 수 없다.

데리다에게 아나콜루톤은 새로운 동반자의 가능성, '타인의 갑작스런 도래'를 수반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게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영문역사상 불연속적인 것으로 가장 유명한 텍스트는 당연히 새뮤얼 콜리지의 <쿠블라 칸>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신원이 불분명한 '폴록에서 사업차 온 사람'의 신비롭고 갑작스런 도래로 인해 영원히 폐기된 꿈을 옮겨 적은 것이다. 아나콜루톤에는 단순한 결핍 이상의 것이 있고, 그 비밀은 '동반자'라는 바로 그 말에 묻혀 있다. '동반자'라는 용어는 퐁타니에와 데리다 둘 다 주장하는 말이고, 분해해 본다면 '빵과 함께'를 뜻하는 'companis'임이 드러나며, 따라서 동반자는 말 그대로 빵을 나누는 사람이다. 가장 유명한 빵 나누는 사람은 물론 예수인데, 삶으로 부활하면서 예수는 빵을 같이 나누었을 때 그를 알아보았던 나그네 두 사람에게만 현시되었다. 그리고 바로 예수는 금방 사라졌다.

저희와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 빵을 들어 축복을 내리시고 떼어 저희에게 나누어 주시매 저희 눈이 열리고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았더니 예수는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누가 24장 30~31절)

빵을 나누는 사이가 된 그 순간에 예수는 다른 사람들을 홀로 남겨두는 훼방꾼이자 아나콜루톤적인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동반자 관계가 성립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오고 가는 것이다. 그들이 길에서 만났던, 예상했고 예측 가능했던 형상은 사라지고 전혀 예상치 못한 형상, 곧 신이라 부를 인물이 도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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