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내가 책을 쓰는 것은, 관심이 가는 주제에 대해 내가 무엇을 생각할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책을 쓰는 동안, 그 책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바꿔 놓지요. 결과적으로, 각각의 새로운 작업은 내가 그 전의 작업으로 도달한 생각들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이론가라기보다는 실험가입니다. 나는 다양한 연구 분야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연역적인 체계를 발전시키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나 자신을 바꾸고,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씁니다.


(푸코)
나의 대답은, 이러한 반응이 그 책의 성공을 증명하는 진술이라는 것입니다. 이 진술은 그 책이 내가 의도한 방식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같은 상태로 존재하지 못하게 하며, 이 책을 읽기 전 사물이나 타자들과 맺었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그 책이 나만의 경험을 넘어선 확장된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푸코) 사르트르 류의 철학에서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주체였습니다. [그 철학 속에서] 이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주체는 세계에 의미를 주는 존재였지요.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즉, 주체가 유일하게 가능한 실존 형태라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주체가 자신을 구성하던 관계들과 더 이상 자기-동일성 속에 있을 수 없는, 그런 경험은 없을까요? 그리고 그 결과, 주체가 그 자체와 결별하고, 그 자신과의 관계를 깨뜨리며, 동일성을 상실하도록 만드는 그러한 경험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까? 이러한 경험이 아마도 영원회귀로 나타나는 니체의 경험이 아닐까요?


(푸코) 이론은 더 이상 실천을 표방하거나, 해석하는 것 혹은 실천에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은 하나의 실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말했듯이 총체화하지 않습니다. 이론은 국지적이며 지역적인 것입니다. 이론은 권력에 맞선 투쟁이며, 권력이 가장 비가시적이고 교활하게 작동하는 곳에서 그것을 드러내고, 그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한 투쟁입니다. 우리가 투쟁하는 것은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투쟁하는 것은 권력을 무너뜨리고 그것을 탈취하기 위해서입니다. 투쟁은 안전거리를 두고 그들을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향해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론은 이러한 투쟁의 지역적 체계인 것이지요.
(들뢰즈) 맞습니다. 하나의 이론은 꼭 연장통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의미심장한 것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유용해야 하며 기능해야 합니다. 이론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론가 자신부터 시작해 아무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이론은 가치가 없거나 시기에 적절치 않은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의 이론을 개정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구축해 냅니다. 우리는 다른 것들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묘하게도 이러한 생각을 명확히 밝힌 사람은, 순수 지식인으로 생각되어 온 프루스트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나의 책을 바깥을 향한 하나의 안경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그것이 당신에게 맞지 않으면, 다른 것을 찾으십시오. 필연적으로 전쟁도구가 될 당신만의 도구를, 스스로 찾으십시오." 이론은 총체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양화의 도구이며, 스스로 다양화합니다. 총체화하는 것은 권력의 본성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이론은 본성상 권력에 대립합니다. 이론이 특정한 지점에서 곤란에 처하자마자, 우리는 그것이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분출되지 못하는 한 어떤 실천적 중요성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푸코)
나는, 휴머니즘이란 말을 통해, 서구인에 대해 이야기되어 온 다음과 같은 담론 모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설사 당신이 권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주권자일 수 있다. 아니, 더 좋게는 당신이 권력 행사를 포기할수록, 그리고 당신에게 부과된 것들에 더욱 순종할수록, 당신은 더욱더 주권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휴머니즘은, 차례로 다음과 같은 일련의 예속적 주권행태들을 발명해 냈습니다. 즉, 몸에 대한 주권자이지만 신에게 순종하는 정신, 판단에 있어 주권자이지만 진리의 질서에 순종하는 의식, 권리 행사에 있어 주권자이지만 사회의 규칙과 자연법에 순종하는 개인, 내면에서는 주권적이지만 외부적으로는 자신의 숙명에 맞춰야 하는 기본적 자유가 고안되었지요. 다시 말해, 서구 문명에 있어서 휴머니즘은 권력을 향한 욕망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권력에의 욕구를 금지하고, 권력을 빼앗길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었지요. 휴머니즘의 핵심은, 주체(주체가 담고 있는 두 가지 의미[주체/종속]를 포함한)의 이론이며, 이것이 그 동안 서구 문화가 휴머니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완고하게 배제해 온 이유입니다.


(푸코)
나는 이 '사회적인 것의 총화'라는 관념은, 유토피아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념은, 서구 세계에서, 즉 자본주의에 이르는 매우 특수한 역사적 궤적 속에서 발생한 것이지요. 우리가 인식하는 유일한 형태 외부에 존재하는 '사회적인 것의 총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비몽사몽간에 내지르는 허튼소리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경험 행동 전략 기획 등이 '사회적인 것의 총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그것이 최소한의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요구라고 말이지요. 나는 반대로 그것이 최대한을 요구하는 것이며, 심지어 불가능한 조건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것들의 총화'는 정확히 수단으로 기능하며, 실현될 수도, 달성될 수도, 영구화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것의 총화'는 파괴의 대상으로서만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유사한 것이 다시는 존재하지 않기를 희망해야 하지요.


(푸코)
어떤 판단이 선과 악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을 때, 그것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용어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 최종적 구분에 대한 정당화가 필요할 경우, 사람들은 개인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해로운지의 문제로 되돌아오지요. 이것은 서구인의 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이원론을 잘 보여줍니다.
보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잘게 나뉘어서는 체계에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든 전선에서-대학에서, 감옥에서, 그리고 정신의학의 영역 등에서-그것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들 모두를 동시에 공격할 힘이 없기 때문에, 차례로 이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단단한 장애물을 타격하고 쓰러뜨립니다. 그러면 체계는 다른 곳에서 균열을 드러내고, 우리는 계속해서 싸웁니다. 우리가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도는 다시 재건되고,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하지요. 이것은 기나긴 투쟁이고, 반복적이며, 통일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되는 체계가 그리고 그 체계를 통해 작동하는 권력이, 그것에 통일성을 부여해 줄 겁니다.




정말 사랑스러운 책이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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