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헤르만 헤세]

from 도서관 2008. 1. 3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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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 데미안


싸이 비튄더바에서 이제까지 들었던 최고의 찬사가 무엇인지 묻는 글을 보았다. 입에 발린 칭찬들이야 널리고 널렸지뭐. 그러다가 예전에 친구가 내게 '너는 나의 데미안'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중딩때였나, 당시엔 그게 먼소리냐 했었지. 그래, 데미안.. 싱클레어, 카인과 아벨, 아프락사스.. 분명히 읽은 것 같기는 한데 이상하게 결말도 모르겠고 아프락사스는 뭐하다가 튀어나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고 해서 도서관에서 빌려 다시 읽었다. 아프락사스가 새 이름인줄 알았는데 새가 도달하고자 하는 신의 이름이더라. 니체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심지어 데미안은 헤세가 니체의 영향으로 쓴 작품이었다고).. 중딩때 어려워서 읽다가 만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수레바퀴 밑에서'나 '향수'도 읽기는 읽었는데 정말 기억 안난다. 향수는 '아예' 백지 상태 캬캬.
싱클레어는 짜라투스트라 식으로 말하면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다시 아이로 성장해 가는 것 같다. 비로소 아이가 되었을 때 스스로 자신이 곧 데미안임을 느끼고.
음, 중딩의 나는 과연 데미안이었을까? 인상 깊은 부분을 조금 인용해 본다. 마지막 문단은 그냥 표현이 멋있어서;


내 친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자세로 다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평소와는 다른 인상을 주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그의 몸에서 발산되고 있었고, 그 몸은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것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은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초점을 잃은 그 눈은 자기의 마음 속이나 아니면 아득히 먼 곳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꼼짝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입은 나무나 돌로 조각된 것이 아닌가 생각될 만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고,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책상 위에 얹어 놓은 손은 나뭇가지를 꺾어다 올려 놓은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가장 생기가 있어 보이는 것은 갈색 머리카락이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혈액의 순환이 정지된 채 굳어 버린 사람과 같았고, 캔버스 앞에 있는정물화의 재료 같기도 한 인상을 주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움직이지 않는 물건처럼 보였다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품위와 무게를 느끼게 했고, 그 속에 강렬한 생명이 충만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이것이 막스 데미안의 참모습이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느 때의 데미안, 나하고 함께 산책을 하거나 지껄일 때의 데미안은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 데미안의 절반 몫도 못 되었던 것이다. 현재 여기 있는 데미안...... 돌처럼 차갑고 단단한인간 데미안, 태고의 꿈을 기다리는 동물과도 같고 바위와도 같으며 죽어 있는 동시에 생명력이 가득 찬 아름답고 차가운 인간 데미안. 이 신비로운 인간을 둘러싸는 정적과 공허, 영기와 별의 공간 그리고 고독......
'지금 데미안은 완전히 자기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전율을 느끼면서 다시 생각했다. 내가 그때만큼 고독에 엄습된 적은 없었다. 나는 데미안과 아무런 관련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먼 곳, 내 눈길이 닿지 못하는 먼 세계에 있었다.
그러한 데미안의 모습을 알아차린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이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의 초인적인 모습을 보고 전율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누구 하나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조각물처럼, 아니 우상처럼(당시 나는 그가 우상으로 보인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딱딱하게 앉아 있었다. 파리가 한 마리 그의 이마에 내려 앉더니 콧등을 거쳐 입술 속으로 기어 갔다. 그러나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지금 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천국에 있을까, 지옥에 있을까.'
그것을 직접 그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수업 시간이 끝나 갈 무렵, 그는 다시 생기를 찾고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시선이 부딪쳤을 때 그는 이미 여느 때의 데미안으로 돌아가 있었다. 도대체 그는 어디 있다가 돌아왔을까. 그는 몹시 피로해 보였다. 얼굴에는 생기가 되살아났고 손도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갈색 머리가 윤기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그 알은 새의 세계이다. 알에서 빠져 나오려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의 곁으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바로는 우리들, [표지]를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것과 개별적인 것, 미래를 향하는 자연의 의지 등을 구현시키고 있는 데 비해 [표지]가 없는 사람들은 현상 유지의 의지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인류란, 그들 역시 인류를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완성된 존재였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고 보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인류는 모두 미래를 향하고 있는 미완성의 존재였다. 우리 인간은 미래를 지향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미래상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한 법칙이 적혀 있는 책은 아무데도 없었다.

나는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작별 인사를 하고 혼자서 현관 문을 나설 때 히아신스의 향기가 송장 냄새로 변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나의 그림자가 이미 우리들 머리 위에 씌워져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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